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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의 혼자서 추는 춤] 이런 이별도 있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5월호
선생님들과 따로 또 같이 춤을 출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다들 어디선가 또 멋진 스텝을 밟으며 하루하루 힘차게 살아가시길 바라요. 예이츠가 어느 시에서 말한 것처럼 "춤과 춤꾼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말이에요. (2023.05.09)
시인이자 번역가인 황유원 작가에게 번역은 곧 '혼자서 추는 춤'입니다. 번역을 통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먼바다를 항해합니다. 번역가의 충실한 가이드를 따라 다채로운 세계 문학 이야기에 빠져 보세요. |
아침에 일어나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어느 작가의 난해한 두 작품을 함께 작업했고, 조만간 다른 작품도 함께 작업하기로 한 어느 편집자 선생님으로부터. 오늘이 마지막 근무라는, 오늘을 끝으로 퇴사한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별 소식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첫 번역서가 나온 지 햇수로 칠 년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 동안 제법 여러 편집자 선생님을 만났다. 대부분의 연락은 메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분들의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생각해 보니 오늘 메일을 주신 분도 그랬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분의 이름과 메일에서 엿보이는 특유의 다정한 문체와 세심한 성격, 그리고 꼼꼼하고 프로페셔널한 편집 실력뿐. 그러니 이것을 '이별'이라고 한다면, 모종의 '상실감'을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과민 반응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그분의 경우, 업계를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니 이런저런 우연이 겹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전을 지나 오후가 되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은 이 기분. 이 기분을 또 언제 느껴봤더라? 그래, 연인에게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 연인과의 관계는 철저히 사적이고 편집자와의 관계는 철저히 공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갑작스러운 작별'이라는 점에서는 두 경우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공적인 관계라고는 해도 번역자와 책임 편집자는 원서와 번역 원고를 통해 아주 특수하고 내밀한 경험을 공유한다.
그렇다고 작품에 대한 감상을 친구들끼리 하는 것처럼 시시콜콜히 나누진 않는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문학과 관련된 일은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해야 하는 업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독서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사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렇듯 이 일에는 이루 말 못 할 고충이 따른다. 나야 늘 최선을 다해 작업하긴 하지만, 어디 일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적이 있었던가? 나의 초고를 보고 한숨을 쉰 편집자 선생님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작년에도 몇몇 편집자 선생님들로부터 이별 메일을 받았기에 오늘 메일이 더 충격적이었다. 몇 분은 내가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서 가장 오랫동안 알아온 분들이었다. 일단은 모두 업계를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이직이 아니라 영원한 작별.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다시 한번 깨우친다.
오늘 작별 인사를 전한 분과 함께 작업한 두 소설은 그 결말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한 권은 "미완인 채로 남아 있다. 아름답다. 이 모든 것이."로 끝나고(『슬픔은 날개 달린 것』), 또 한 권은 "그들에게는 아직 밝은 빛이 한두 시간 정도 남아 있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숲을 그린다."로 끝난다(『래니』). 신기하게도 이 두 결론이 오늘의 내게 어떤 답을 전해 주는 듯하다. 모든 것이 결국엔 미완일 수밖에 없으나, 그것은 또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과 또 나를 둘러싼 숲에 아직 밝은 빛이 남아 있다는 것.
그분께 그리고 한때 함께 일했던 다른 분들께도 안부를 전하고 싶다. 선생님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번역은 혼자서 추는 춤이라며 이 칼럼을 시작하긴 했지만, 사실 편집하는 기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믿어요. 편집자도 대개 혼자서 춤추는 직업이겠죠. 놀라운 사실은 각자가 떨어져서 혼자 추는 춤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함께 추는 춤이 된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아니면 평생 소식도 모른 채 살다 세상을 뜨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죠. 하지만 선생님들과 함께, 그러니까 따로 떨어져서 함께 춘 춤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어떤 춤동작은 꽤 봐 줄 만했겠지만, 또 어떤 춤 동작은 지금 다시 봐도 좀 어설플지 모르겠어요. 때로는 열심히 춰도 관객들이 알아주지 않아 서로 몰래 아쉬워하기도 했겠죠. 하지만 저로서는 선생님들과 따로 또 같이 춤을 출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다들 어디선가 또 멋진 스텝을 밟으며 하루하루 힘차게 살아가시길 바라요. 예이츠가 어느 시에서 말한 것처럼 "춤과 춤꾼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말이에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조금이라도 춤을 더 잘 추게 된다면 그건 모두 선생님들 덕분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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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번역가.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초자연적 3D 프린팅』, 『세상의 모든 최대화』, 옮긴 책으로 『모비 딕』, 『바닷가에서』, 『폭풍의 언덕』, 『밤의 해변에서 혼자』, 『짧은 이야기들』,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시인 X』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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