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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sugar
9화 - 드라마 <작고 아름다운 것들>
'살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죽기 살기로 사랑을 정복하는 거'라는 그의 말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고민들 가운데 살면서도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지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누군가의 '슈거'가 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스스로의 '슈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2023.06.27)
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
고민 상담 칼럼을 좋아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오는 고민 상담 글을 읽곤 했다. 짝사랑이나 이별 후폭풍과 같은 연애 고민부터 가족 간의 불화, 친구와의 갈등, 진로에 대한 불안에다 심지어는 단순히 심심하다는 것까지, 지식인에는 인생의 온갖 크고 작은 고민들이 모여 있다. 고민을 토로하는 연령대도 초등학생부터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다양하다. 끊이지 않는 한숨처럼 길게 쓰인 고민들을 읽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고민 없는 사람이 없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고민을 토로할 수 있듯 누구나 그 고민에 답할 수 있다는 점도 재밌다. 고민에 답하는 데 전문 자격은 필요 없다. 일말의 관심과 정성이 모여 달달한 위로부터 신랄한 쓴소리를 만든다. 대부분의 고민들은 정보성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다들 각자의 인생을 통해 지혜를 짜내기 때문일 테다.
"난 조언할 처지가 안돼. 내 인생은 개판 오 분 전이야."
드라마 <작고 아름다운 것들>에서 클레어(캐서린 한)가 '슈거(sugar)'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고민에 답하는 고민 상담 칼럼을 연재할 것을 요청받자 한 말이다. 클레어의 인생은 그가 말한 것처럼 '개판 오 분 전'이다. 남편은 그를 집에서 쫓아냈고, 사춘기인 딸과는 소통이 힘들고, 직장에서는 오해로 정직당했고, 사람 구실 못하는 동생은 딸의 학자금까지 빌려 갔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위대한 작가가 되길 꿈꿨으나 현실의 문제들에 부딪혀 글 쓰는 삶도 내려놓은 지 오래다. 일도 가족도 뭐 하나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 인생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감당하기에도 벅찬데, 남들을 위한 조언이라니. 그렇지만 그에게 칼럼을 요청한 친구는 사람들의 고민이 담긴 편지를 쥐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개판 아닌 인생이 어딨어."
드라마 매화마다 '슈거'는 누군가의 고민에 하나씩 답한다. 20대의 자신에게 얘기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해줄 것인지 묻는 사람, 아이를 가질지 말지 어떻게 결정하는지 궁금한 사람, 6개월이 된 딸에게 뇌종양이 생겨서 딸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며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 사람, 타인에게 보여주기 두려운 모습을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 등등.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고민'이 되듯, 그들에게 답장을 쓰는 과정 역시 쉽지 않다. 클레어는 자신이 과연 조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끝없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고민의 답을 찾아간다.
"모든 삶에는 자매선이 있어요. 그 배에 타고 있는 건 가지 않은 상상의 길을 가서 다른 무언가가 돼 있을 우리 자신이에요. 당신 앞에 있는 건 선택의 갈림길과 어느 쪽을 선택하든 무언가를 잃을 거란 사실이에요. 그러니 펜과 종이를 꺼내 목록을 만드세요. 현재 삶에 대한 모든 걸 적고 미래의 삶에 관한 상상하는 모든 걸 적으세요. 하나는 당신이 가질 삶이고 하나는 갖지 못할 자매의 삶이에요. 선택은 당신 몫이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자매의 삶이 뭐였든 간에 중요했고, 아름다웠고, 우리게 아니란 거죠."
자신의 인생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클레어의 답변은 시종일관 담담하면서 묵직하다. 고민 가득한 현재는 과거의 선택을 통해 만들어졌음을, 그리고 선택의 주체는 자신이었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내가 내리지 않은 선택은 나의 인생이 아니기에 더더욱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분명하게 해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조언에 마음 깊이 공감하게 되는 이유는, 클레어가 자신의 선택을 끝없이 후회하면서 '내가 그리던 인간상에서 멀어졌을 때 내가 누군지' 다시 돌아보는 인물이라서다.
철없는 시절 엄마에게 했던 말들, 암으로 예상치 못하게 일찍 떠난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건, 과거 실패로 남은 결혼과 온갖 남자들과의 해프닝. 클레어는 미결 상태로 남겨두었던 과거의 잔해들과 수없이 마주한다. 후회스러운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그런 선택을 내린 데 영향을 미친 타인을 습관적으로 탓한다. 남의 탓을 하는 건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보호하는 방어기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는 회피이기에 오히려 일을 더 엉망으로 만든다. 클레어의 태도가 달라지는 건 그가 타인의 고민을 위해 답을 찾아내는 과정에서다.
불가능한 질문들에 답하려고 노력하며 고뇌 중인 모든 여성들에게 쓰는 '슈거'의 편지는 스스로를 위한 것도 된다. 그는 엄마에게 받았던 조언("넌 폭주하는 기차에 탄 게 아니야. 네가 하기 싫다면 언제든 내리면 돼", "살면서 겪는 최악의 일들 때문에 원하는 걸 포기해선 안 돼.")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다음, 그만의 언어로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준다. 조언할 처지가 안된다던 '슈거'의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처지로부터 나온 진심 어린 말이기에 그 이름처럼 달콤하게 힘이 되는 위로가 된다. 대단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타인을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한, 누구라도 서로에게 '슈거'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는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든든하게 만든다.
물론 그렇다고 클레어의 '개판'이 전부 해결되진 않는다. 인생의 문제와 고민은 끝이 없는 법이라, 그는 드라마 마지막까지도 또 다른 '개판 오 분 전'의 상태로 살아간다. 그래도 그 모든 개판을 딛고서 '사랑'을 말하는 그의 모습은 큰 울림을 준다. '살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죽기 살기로 사랑을 정복하는 거'라는 그의 말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고민들 가운데 살면서도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지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누군가의 '슈거'가 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스스로의 '슈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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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