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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의 제철숙제] 해가 지지 않고 우리는 지치지 않고

5화 : 하지엔 햇감자가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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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무렵은 지난 가을에 심어 땅속에서 겨울을 나게 한 마늘과 양파를 캐는 때이자, 봄에 심은 감자를 수확하는 때다. (2023.06.20)


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여름에 이르는' 하지(夏至)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다. 동지부터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해가 정점에 이르러 낮 시간이 자그마치 14시간 45분이나 된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해와 함께하는 셈이다. 1년 365일 중 그렇게 점 하나를 콕 찍은 것처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 날은 많지 않아서 마땅히 '낮이 가장 긴 날'을 어떤 식으로든 기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해가 제일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긴 만큼 북반구의 땅이 가장 많은 태양열을 받는 것도 이때다. 땅 위에 차곡차곡 쌓인 열기로 하지 이후부터는 기온이 크게 올라가고 몹시 더워진다. 그러나 더위를 탓하는 것은 하지를 반만 아는 일. 그렇게 내리쬔 태양이 땅속의 많은 것을 여물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 무렵은 지난가을에 심어 땅속에서 겨울을 나게 한 마늘과 양파를 캐는 때이자, 봄에 심은 감자를 수확하는 때다. 씨감자(보통 감자를 대여섯 등분으로 잘라 서늘한 곳에서 자른 면이 아물고 싹이 나도록 둔 다음 밭에다 심는다) 형태로 흙 속에 심은 지 고작 3개월 만에 수확하는 것을 생각하면, 감자가 왜 보릿고개를 넘게 해준 식량인지 이해된다. 가을걷이한 곡식을 겨우내 아껴먹다가 더 이상 버텨낼 식량이 없어 배를 곪던 시절, 빨리 자라 배를 채워주던 감자는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작물이었을까. 거친 시기에 구하러 와준 '구황 작물'답다. 

이맘때 농부의 딸로서 해야 하는 1차 숙제는 수확이다. 햇감자는 하지 무렵 수확한다 해서 '하지 감자'라고도 불린다. 하지 숙제를 하러 시골집에 갔다. 감자 캐기라니 재밌겠다고 따라나선 반려인 강과 함께였다. 토요일 저녁 인숙 씨는 인심 좋은 주인처럼 고기를 배불리 먹였고 감자밭이 '쬐끄만 해서' 일할 것도 별로 없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이튿날 새벽, 주인집의 부름에 깨어나 졸린 눈으로 작업복을 입었다. 밭으로 가는 길에 강이 귓속말을 했다.

"... 감자를 새벽 5시에 캐야 하는 줄은 몰랐어."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힘든 일을 끝내놓기 위해 이 무렵 농부들은 동터오기 전부터 밭일을 서두른다. 인숙 씨가 말한 5시가 오후 5시인 줄 알았던 강은 믿기지 않는단 얼굴이다. 

흰 꽃이 진 감자 줄기를 힘차게 뽑아내고 비닐을 걷은 뒤, 밭고랑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본격적으로 감자를 캐기 시작했다. 호미가 지나간 자리로 감자가 빼꼼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반가움에 잠이 달아났다. 아무렴 농사일은 파종보다 수확이 즐겁기 마련. 나란히 진도를 나가는 세 사람의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강은 어떤 동선으로 호미질을 해야 감자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놓치는 감자 없이 땅을 훑을 수 있는지 최적의 방법을 연구하고 앉았고, 나는 흙투성이 얼굴로 나타난 청개구리를 구경하느라 미적대고, 인숙 씨는 주먹만 한 감자가 나타날 때마다 "고~맙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호미 끝으로 감자를 찍을 적마다 "아이고 우짜나 우째, 미안 미안" 정체 모를 사과를 하느라 바빴다.



흙을 뒤엎는 자리마다 감자가 쏟아지니 인숙 씨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3월에 심은 씨감자가 크기도 작고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단다. 감자가 풍년인 건 좋은 일이지만 양이 많으니 속도는 더디고 해는 점점 뜨거워졌다. 하필 감자밭이 길 옆이라 온 동네 사람들이 오토바이 타고 가다, 트랙터 몰고 가다 멈춰 서서 한 소리씩 거들었다.

"아따, 감자 잘 됐다."

"아이고야, 서울 사위 다 타네."

묵묵히 감자를 캐던 강이 또 귓속말을 했다.

"어젠 한 시간이면 다 캔다더니 순 거짓말이었어."

다행히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오기 전에 일을 마쳤다. 허리를 두드리며 뒤돌아본 밭에는 동글동글한 감자들이 일광욕하듯 누워 있었다.  

예부터 하지가 지나면 감자 싹이 죽고 보리가 마른다 해서 선조들은 이를 '감자 환갑', '보리 환갑'이라 불렀다. 때를 넘기면 안 된다는 의미로 감자와 보리에게 환갑날을 붙여준 게 귀엽기도 하다. 하짓날 감자를 캐면 뭐라도 해먹어야 풍작이 든다고 믿기도 했다. 철 따라 새로(新) 난 과실이나 곡식을 집안의 신에게 먼저 올리고(薦) 나눠먹던 천신(薦新) 풍습 중에서도 '감자천신'인 셈이다. 햇감자를 먹는 일이 풍작을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란 걸 떠올리면 마땅히 해야 할 하지 숙제를 찾아낸 기분이다.



점심엔 땀 뻘뻘 흘리며 캐낸 감자를 넣어 감자밥도 짓고, 불판에 올려 고기와 함께 구워도 먹었다. 환갑을 맞은 보리 맥주도 한 캔 땄다. 지난주에 캤다는 마늘과 양파도 불판에 올랐다. 땅과 태양의 기운을 머금고 영근 햇감자, 햇마늘, 햇양파로 한결 풍요로워진 하지 밥상. 부른 배를 두드리며 평상에 누워 있는데, H가 오늘 지하철에서 기관사님이 소개하는 하지 얘기를 들었다며 51초짜리 녹음 파일을 보내왔다. 자글자글한 잡음 사이로 부사를 길게 늘이는 말투의 주인공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에는 일 년 중 해가 가자~~~앙 높게 뜨고 또 낮 시간이 제이~~~일 길어서 24시간 중 무려 14시간 35분이나 낮이 이어진다고 하는데요. 여러분, 하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더라도 이런 얘기는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에 수확한 감자가 제일 맛있다.' 이번에 맞이하는 하지에는 그리고 오는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포슬포슬한 햇감자 한번 맛보시는 것도 어떨까 싶습니다. 오늘은 올해 중 가자~~~앙 뜨거운 날씨가 될 거 같다고 합니다. 건강한 휴식도 잊지 마시고 남은 하루도 최고로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정겨움에 한 번 더 재생 버튼을 누르며 이 분도 제철 숙제파네, 싶어 혼자 웃었다. 오전에 찍은 감자 수확 현장의 사진도 몇 장 전송했다. 조만간 친구들을 만나 하지 감자에 보리 맥주를 마셔야지. 이 무렵 우리가 자주 나누는 말 중 하나는 "아직도 환하네!'라는 말. 그 말을 할 때의 표정들도 대체로 환하다. 긴긴낮을, 좀처럼 지지 않는 해를 선물 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뒤엔 누군가 꼭 이렇게 덧붙인다.

"근데 그거 알지? 이러다 금방 어두워진다."

지지 않는 해를 등불처럼 밝혀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어둑해진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된다. 일몰을 지켜보기로 해놓고선 놓치기 일쑤.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건 행복한 일을 하고 있을 때라 하던가. 그건 하지의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리라.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하는 일이 다 큰 어른들에게도 필요하다. 하지를 지나면 낮의 길이는 매일 1분 남짓 짧아지기 시작한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딱 1분씩만 더 즐겁게 보내라는 것처럼. 겨울의 긴긴밤에 모여 앉아 나눌 추억을, 여름의 긴긴낮에 만들어두라는 말처럼.



하지 무렵의 제철 숙제 

제철을 맞은 '하지 감자'를 각자의 방식으로 즐겨보세요. 감자전, 버터감자구이, 감자옹심이, 감자떡, 감자튀김, 감자채볶음... 우리를 구하러 온 감자의 변신은 무궁무진합니다. 더위를 탓하기보다 이토록 길어진 낮이, 뜨거워진 태양이 키워낸 맛을 즐겨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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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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