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기다린 줄도 모르고 기다린 책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344회) 『일 년 내내 여자의 문장만 읽기로 했다』, 『가족의 역사를 씁니다』, 『맡겨진 소녀』
'책임'감을 가지고 '어떤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죠. '어떤,책임' 시간입니다. (2023.06.08)
불현듯(오은) : 이번 주제는 '기다린 줄도 모르고 기다린 책'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읽고 나서 단순히 좋았다는 것 이외에 어떤 것이 더 있는 책이어야 할 것 같았어요. 뭔가 내 인생에 어떤 균열을 냈다든지 말이에요.
김이경 저 | 서해문집
김이경 작가님은 워낙 좋아하는 작가님이라 새 책에 나올 때마다 항상 챙겨서 읽고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김이경 작가님의 글과 생각, 이야기를 좋아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요. 이 책을 보고 좀 깨닫게 됐어요. 먼저 관심사가 비슷하고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자 노력하면서 글을 쓰는 분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작가님의 시원시원하면서도 리드미컬한 그 문체들이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하물며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여성 작가들의 책만을 읽고 쓴 독서록이라니, 이 책에 호기심을 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여성 저자가 쓴 책을 읽으며 작가가 생각한 것들을 기록한 에세이이자 독서집이에요. 그동안 작가님은 <시사인>, <한겨레21>, <주간 경향>, <프레시안> 등에서 여성 작가의 책을 읽는 독서 에세이 연재를 많이 하셨어요. 그게 바탕이 된 것 같고요. 책의 구성은 크게 두 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첫 번째 장은 여자가 쓰고 여자가 읽은 '여여한' 독서, 두 번째 장은 '나를 단단하게 만든 여자의 문장들'이라는 제목으로 작가님이 책 속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을 왼쪽에 배치하고 오른쪽에 자신의 감상을 쓴 글입니다. 전에 이 매체에서 연재하실 때 몇 개의 글은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단행본으로 묶이니까 확실히 더 깊이 읽게 되고 빠져들어서 읽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금 작가님의 생각으로 또 읽게 되는 것도 반가웠고요. 몰랐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 좋았습니다.
좋은 책이면 됐지 저자의 성별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지 모른다. 오랫동안 나도 그리 믿고 읽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시대적 사회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성차별에 근거한 사회에서 이를 뛰어넘는 혜안을 보여주는 책은 드물다. 편향을 극복하려면 편향된 독서가 필요하다. 편향임을 인정하고 편향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균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책에 담긴 책 목록을 살펴보면서 너무 심오한 이야기 아닐까, 무겁지 않을까, 너무 사회, 정치적인 이슈가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 워낙 문장 자체가 생활 감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책을 읽으시면 바로 눈치채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작가님의 필력이 워낙 탄탄하시니까요. 물론 이 책의 저자를 전혀 몰라도 무척 책이 재밌게 읽히는 책이고요.
짧게 칼럼으로 연재했던 글이기 목차를 보면서 궁금했던 책이 있거나 궁금했던 저자가 있다면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제목에 끌려서 읽을 수도 있고요. 이런 방식의 독서를 할 수 있는 책이어서 또한 매력적인 책이기도 했습니다.
박사라 저 / 김경원 역 | 원더박스
박사라 저자는 재일 코리안 2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 코리안 3세입니다. 역사를 공부했고요. 이 책은 자신의 가족, 그러니까 재일 코리안 1세대와 2세대, 그리고 자신으로까지 이어지는 가족의 역사를 생활사로 기록해서 완성한 책이에요. 자신의 고모, 고모부, 큰아버지 같은 분들을 인터뷰해서 제주 4.3 사건에서 살아남은, 그리고 일본으로 밀항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담은 거죠.
일단 이 저자가 생활사를 기록해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우리 가족들이 왜 일본으로 건너왔을까, 하는 점이었대요. 그리고 그러는 데에는 1945년 해방 이후에 벌어진 제주도의 혼란한 상황들, 그리고 4.3으로 이어지는 잔혹한 역사가 있었던 것이죠.
이 책은 4.3 그리고 해방 이후에 벌어진 정치적인 혼란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정말로 한 개인이 어떤 구체적인 삶을 살았는지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고모의 얘기인데요. 밀항을 하려다가 수용소에 잡힌 거예요. 그 수용소가 역사적인 기록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오무라 수용소'라는 곳이었는데요. 고모는 뜻밖에 그곳에서의 생활이 "퍽 재미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놀랍죠. 어쩌면 수용소 전의 일상과 생활이 너무 힘들었거나 그곳에서 나온 후의 삶이 또 힘들었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그냥 재미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거고요. 이거는 진짜 역사에서는 읽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라 너무 놀라웠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얼마나 입체적인지, 누구에게나 복잡한 사정이 다 있다는 생각들을 이 책 보면서 너무 많이 하게 됐고요. 저는 학교 다닐 때 역사 과목을 진짜 싫어했는데요. 그 안에 진짜 사람들이 살았다는 생각을 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못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인이 돼서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뒤늦게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지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고요. 또 제가 구술사, 생애사 책들을 항상 좋아하고 열광하면서 읽는 이유가 역사 안에 있는 사람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났던 사람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클레어 키건 저 / 허진 역 | 다산책방
키건의 책은 처음 접했는데요. 정말 필요한 단어만 골라 쓴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딱 그만큼만 이야기해도 된다, 라는 믿음이 있는 작가 같았거든요.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서사에 있어서도 딱 정확하게, 적확하게 그만큼만 이야기하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 『어린이 여행법』을 읽으면서도 느꼈는데요. 이 소설을 보면서도 어린이를 돌보는 일, 보살피는 일, 존중하는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크게 뒤흔들고 뒤바꿀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의 마음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위로하면 금방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얼마나 복합적이고 시시각각 변화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어요.
주인공이 태어난 집은 가난하고 부모는 무심해요. 자식이 많기도 하고요. 집안일과 농사일이 워낙 정신없기 때문에 아이들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챙겨주지 못하죠. 이 집에는 네 명의 아이가 있고요. 어머니가 다섯째를 임신한 상태입니다. 그 중 주인공은 셋째이고, 여자 아이죠. 집도 정신이 없고, 살림살이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주인공이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지게 되는데요. 원제인 'foster'라는 단어가 위탁, 양육하다 라는 느낌의 단어이니까요. 짐작하실 수 있겠죠. 1980년대에 어떤 여름이 배경이 되는 소설이기도 한데요. 주인공 아이가 먼 친척의 집에 도착을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아이의 심리 묘사였어요. 어떤 상황을 파악하고, 사람을 바라보면서 생각이 계속 변화하는 모습, 또 어떤 것이 이질감을 느끼게 만드는지, 무엇이 불쾌한지, 어떤 것이 기쁜지, 하는 것들을 헤아리는 일을 아이는 계속 하고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아주 잘 드러나는 책인데요. 처음 '킨셀라' 아주머니 아저씨 집에 도착한 순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은 어떨까 궁금하다. 키 큰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갓 짜서 아주 따뜻한 우유를 마시라고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 가능성은 훨씬 낮지만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프라이팬에 팬케이크 반죽을 부으며 한 장 더 먹고 싶은지 묻는 장면도 그려진다.
정말 가슴을 후비는 문장들이 한가득하거든요. 아마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꿈틀거리는 감정 같은 것들을 계속 낚시하듯이 길어 올리면서 읽게 될 것 같아요. 더욱이 마지막 장면을 읽는데 이 장면을 기다린 줄도 모르고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은 날 독서 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모든 여름은 덥다. 그 중 어떤 여름은 찬란하다." 더우면서 찬란한 소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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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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