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책 > 김중혁의 북커버러버
[김중혁의 북커버러버] 칩 키드 - 『쥬라기 공원』
3화 - 『쥬라기 공원』
칩 키드는 북 디자이너야.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북 디자이너 중 한 명일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와 올리버 색스는 책을 낼 때 '칩 키드가 책 디자인을 맡을 것'이라고 계약서에 표시해둔대. (2023.06.01)
격주 목요일, 소설가 김중혁이 좋아하는 북커버를 소개하는 칼럼 ‘김중혁의 북커버러버’를 연재합니다. |
전자책은 몹시 사랑스럽지. 손바닥만한 아이패드에 수천 권의 책을 넣어 다닐 수 있어. 내 손바닥이 좀 큰 편이긴 하지, 하하하. 책을 읽고 싶을 때면 언제든 전원 버튼을 누르면 돼. 번쩍, 밝은 화면 속에 새로운 세상이 가득하지. 글자 크기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멋진 문장이 나오면 옮겨 적을 필요도 없어. 그냥 복사해서 붙여 넣기 하면 되니까. 아쉬운 게 딱 하나 있어. 표지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거. 책표지를 선명한 사진으로 넣어두었지만 아무래도 실감이 덜 나고, 책등이나 뒤표지도 볼 수 없으니까. 기술이 좀 더 발전하면 책 모양의 전자책이 나오지 않을까? 책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전자책인 거야. 이상한가? 그런데 이거 어쩌지, 배터리가 5퍼센트밖에 없네. 충전기가 어디 있더라?
물론 이 자료들을 스마트폰에 저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스마트폰은 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종이는 죽었다 부활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지 않는다.
_『한끗 차이 디자인 법칙』, 칩 키드, 36쪽
칩 키드는 북 디자이너야.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북 디자이너 중 한 명일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와 올리버 색스는 책을 낼 때 '칩 키드가 책 디자인을 맡을 것'이라고 계약서에 표시해둔대. 계약서에 또 어떤 조항들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 죽겠네. 종이 두께와 글자꼴과 글자 크기와 종이에서 나는 냄새도 정해둔 거 아닐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시트러스 향이 나는 책으로!
칩 키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이야. 책표지로 사용된 이미지가 영화의 포스터에도 등장했고, 공룡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형태가 됐으니까. 칩 키드가 TED 강연에서 『쥬라기 공원』을 작업한 이야기를 들려 줬어. 자연사 박물관에 가서 공룡뼈도 살펴보고 기념품 가게에 가서 공룡 그림도 샀대. 사무실로 돌아와서 공룡 뼈 사진 한 장을 복사해서 그 위에다 트레이싱 페이퍼를 올려 두었고, 래피도그래프 펜(rapidograph pen)으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어. 칩 키드는 이렇게 말을 이어 나갔지.
나는 공룡을 재구성하기 시작했어.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어. 어느 순간, 나는 멈췄지.
너무 멀리까지 가는 게 아닌가 싶을 때 그만뒀어.
북 디자이너들이 어떤 식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했는데 칩 키드의 말을 듣고 깨달았지. 예술 작업은 비슷하구나. 내가 소설을 쓰는 방식하고도 닮았어. 소설가 역시 꿈에서 소름 끼치는 계시를 받을 때 말고는 현실을 모사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니까 말야. 현실 속의 어느 한 장면을 머리 속에 복사한 다음, 그 위에다 트레이싱 페이퍼를 올려두고 그대로 따라해 봐.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나만의 래피도그래프 펜으로, 나의 기억으로, 나의 손끝으로, 비슷하지만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거지. 내 경우에는 그걸 그림이 아니라 문장으로 만든다는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건, 어디서 멈추는가, 어디까지 닮게 할 것인가, 얼마나 다르게 그릴 것인가, 완성됐다는 걸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
『한끗 차이 디자인 법칙』과 『고 GO』를 보면 칩 키드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하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그중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
칩 키드는 Augusten Burroughs가 쓴 『Possible Side Effects』라는 책 표지에 제목을 풍자해서 손가락이 여섯 개인 손을 그려 넣었어. 얼마 후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사는 팬으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대.
이 표지를 보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첨부된 사진 속에는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표지와 똑같은, 손가락이 여섯 개인 손을 들고 있었어. 예술이란 그런 건가봐. 내가 마음껏 상상한 세계를 있는 힘껏, 그럴 듯하게 그려내면,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 그 세계를 보고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내 소설을 읽고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해준 사람이 있어.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같은 세계를 (같다기보다는 닮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가 된 거지. 그런 일을 하기에 책보다 좋은 건 없는 것 같아. 전자책 말고 종이책.
가끔 서점 구석의 귀퉁이 책장에 꽂혀 있을 내 책을 상상해봐. 딱히 누굴 기다리지는 않지만 누군가 자신을 뽑아들면 몸서리치며 좋아하지. 표지를 보고 "엇, 재미있겠네, 집으로 데려가야겠다" 혼잣말을 하면서 책과 함께 서점을 나서는 어떤 사람을 떠올려. 내 머리에서 시작했고 손으로 직접 타이핑해서 종이 위에서 이야기가 된 책의 세계, 그걸 넘겨가면서 해독하려 애쓰는 누군가의 눈빛과 손길과 숨결. 책을 생각하면 늘 그런 상상을 하게 되지.
엇, 아이패드 충전 다 됐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김중혁의북커버러버, 북커버, 책표지, 쥬라기공원, 한끗차이디자인법칙, 칩키드, 북디자인, 책표지디자인, 고GO, PossibleSideEffects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18,000원(10% + 5%)
4,500원(10% + 5%)
12,420원(10%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