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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영문법의 세계로 범민을 초대하다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3화
무엇보다 내가 범민과의 영어 공부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건 이 시간을 통해 왜 영어를 공부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자주 나눴다는 점이다. (2023.05.02)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을 연재합니다. 6개월 육아 휴직을 낸 아빠 아나운서 전종환이 제주 일상을 이야기합니다. |
제주에서는 사교육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게 아들 범민을 온전히 자유 방임형으로 키우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와 아내는 일곱 살 범민에게 필요한 공부를 직접 가르쳐보기로 했다. 수학은 아내, 영어는 내 담당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영어를 가르치거나 교육 방법에 대해 논할 만큼의 전문 지식이 없다. 그저 부모 된 입장에서의 판단인데, 요즘의 영어 교육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보였다.
첫 번째는 어릴 적부터 영어를 충분히 노출시켜 하나의 언어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었다. 놀 듯 공부해 아이의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장점이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능숙한 영어를 노출시켜 줄 능력이 없었다.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식사를 하며 종종 영어로 말을 걸어봤지만 우리의 대화는 "How was your day?", "good"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매일 서로의 안부만을 묻는 영어 노출이 과연 교육이 될 수 있는 건지 회의가 들었다. 아, 다른 방법도 시도해 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넷플릭스 콘텐츠를 영어로 보여줬지만, 그럴 때마다 범민은 능숙하게 리모컨을 조작해 TV를 꺼버렸다.
나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우리말을 바탕으로 영어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래서 영어를 외국어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 쉽게 말해 '영문법'의 세계에 범민을 초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영문법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쯤이었다. 동네 모든 형들이 공부하던 작은 녹색 책자 『성문 기초영문법』을 받아들고 나는 비로소 중학생이 됐다는 설렘과 이 책을 정복해야 부모님이 바라는 좋은 대학 입학이 가능하겠다는 부담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기초에서 기본으로 또 종합영문법으로 이어가며 공부했지만, 책이 두꺼워졌을 뿐 내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영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나는 동명사를 왜 동명사라 부르는지 to 부정사를 왜 하필 그리 부르는 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우리말과 한자와 영어가 마구 섞여 있는 영문법의 세계가 나는 어려웠다. 대학에서 처음 본 토익 점수 6백점은 내 초라한 실력의 증명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수도 있었겠으나 군복무 시절 우연히 만난 『English grammar in use』라는 책을 통해 나는 비로소 영어의 세계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내가 알던 영어의 세계를 바꿔놓았다. 과거 공부했던 영문법 책이 일본식 품사를 기본으로 했다면 이 책은 영어를 온전히 영어로 이해하게끔 도와줬다. 관계사니 동명사니 이런 한자 개념에서만 벗어나도 영어는 달리 보였고, 현실에서 쓰일법한 예문들은 언어에 대한 이해를 높여줬다. 나에게는 혁명에 가까웠던 이 영문법의 세계를 나는 범민에게 전수해주고 싶었다.
범민과의 영어 수업이 시작됐다. 나는 다양한 검토 끝에 고른 영문법 책을 펴놓고 범민에게 'be 동사'의 세계를 설명해줘야만 했다. 그런데 '동사'라는 단어부터 턱하니 막혔다. 동사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동사라는 단어부터가 내가 그리 피하고 싶었던 한자의 세계가 아니던가? 그게 싫다면 무어라 가르쳐야하나? verb 라고 알려줘야 하나? 그건 온당한 방법일까? 일곱 살 범민을 앞에 앉혀두고 나는 쩔쩔맸다. 문제는 동사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개념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자가 필요했다. 결국 나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한자의 세계로 돌아와야만 했다.
"범민아. 동사라는 게 있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동사라고 하거든. 먹다. 가다. 놀다. 이런 것들 말이야. 그런데 be 동사는 좀 달라. 이건 내 행동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주는 동사야. 나는 범민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런 거 말이야."
범민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파악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매일 아침 영어를 공부했고 이제 범민은 다른 건 몰라도 be 동사만큼은 자신 있어 한다. 차를 타고 갈 때 "I"를 외치면 "am"으로 답하고 "You"라 하면 "are"를 말한다. 한 달 동안 "I am"과 "You are", "He is"를 반복하니 마치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be동사를 익히게 된 것이다. 배운 걸 활용해 짧은 영어라도 말할 수 있게 되니 범민 역시 즐거워했다. 그렇게 한 달에 걸친 be 동사 공부를 마치고 우리는 다음 단원으로 넘어갔다. 물론 be 동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우리는 다시 당황했고 학습 속도도 눈에 띄게 더뎌졌지만, 그럼에도 함께 반복해서 공부하면 결국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조금씩 싹트고 있음을 우리 부자는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범민과의 영어 공부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건 이 시간을 통해 왜 영어를 공부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자주 나눴다는 점이다. 범민은 수업이 지루해질 때면 화난 표정을 지으며 대체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 지 따지듯 물었다. 나는 영어라는 언어가 지금의 세상에서 갖는 위상과 영어를 잘함으로써 얻게 될 네 인생의 장점들에 대해 설명했다. 한참을 설명하고 나면 능숙한 영어 구사자가 될 자신의 미래가 그럴싸하게 여겨졌는지 범민은 눈을 반짝이며 다시 공부에 집중하곤 했다.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30분을 범민의 영어 공부에 할애한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로 인해 범민의 영어 실력이 크게 늘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일곱 살 아이가 be동사를 이해해야 얼마나 이해할 것이며 관계대명사를 알아봐야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리고 이걸 벌써 다 이해해버리면 남은 초중고의 영어 수업 시간에는 대체 무얼 공부해야 한단 말인가? 다만 이런 기대는 있다. 훗날 범민이 영어 공부를 해보고자 제대로 마음먹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처음 『English grammar in use』라는 책을 집어들었던 바로 그런 순간에, 아빠와의 공부 시간을 떠올려 주면 좋겠다. 그리고는 '일곱 살 나를 이해시키려고 우리 아빠 참 많이 애썼네'라고 생각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번 달은 '일반 동사'다 범민아. 같이 공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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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아나운서. 에세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을 썼다.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하고 아내와 아들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