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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소설을 쓰고 앉아 있는 사람
'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화
학생들이 적어준 익명의 강의 평가에 따르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신이 무엇을 묻든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소설을 쓰는 제가, 여기 앉아 있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2023.05.25)
격주 목요일, <채널예스>에서 소설가 문지혁의 에세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연재합니다. |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실 우리는 진짜 만나지는 않았지요. 아마도 지금 당신은 언젠가의 제가 밤을 새우며 써서 편집자에게 전송한 텍스트 데이터, 정확히는 당신 눈앞의 컬러 디스플레이 위에 표시되고 있는 픽셀을 보고 있을 겁니다. 핸드폰, 노트북, PC, 무엇을 통해서든지요.
우리가 진짜로 만났다면 스몰토크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니지는 않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주고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질문들이요. 오늘의 날씨라든가, 미세 먼지 수치, 점심 메뉴나 연예 뉴스, 최근 본 영화와 드라마 혹은 (드물게는) 책,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의 선전 같은 것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 있지 않고, 스티븐 킹식으로 말하자면 언어와 문자를 통한 일종의 '정신 감응'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일단 저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눈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이왕이면 테이블 위에 따뜻한 커피나 차, 케이크라도 하나 두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처음 만났고, 그러므로 자기를 소개해야만 하겠지요. 아마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는 소설 쓰는 문지혁입니다.
어떤가요. 많이 어색한가요? 소설가나 작가, 혹은 번역가나 강사가 아니라, 소설 쓰는 누구라니요. 데뷔 전에는 저도 왜 많은 작가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소설가 누구누구'라고 하지 않고 '소설 쓰는 누구입니다', '시 쓰는 누구입니다', '평론하는 누구입니다'라고 말하는지 의아했습니다. 들을 때마다 약간 간지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제 14년 차 작가가 된 지금은 누구보다도 그 말을 잘 이해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말하니까요. 왜일까요?
그것은 '쓴다'는 것이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는 명사고, 명사는 결코 해당하는 말의 의미를 다 설명해 주지 못하지요. 의사는 치료하고, 선생은 가르치고, 미화원은 청소합니다.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사람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소설가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반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늘 쓰는 건 아니잖아요? 하루에 몇 분이나 소설을 쓰는데요?'
맞습니다. 대부분의 소설가는 대부분의 시간을 쓰지 않고 흘려보냅니다. 쓰는 시간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지요. 하루에 네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 작업하는 소설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가 실제로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은 그것의 반, 아니 반의반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엔 큰 오해가 있습니다.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타이핑을 하거나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거든요. 소설가는 아주 가끔 소설을 쓰지만, 동시에 언제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걸으면서, 샤워를 하면서, 손톱을 깎으면서,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와 소설을 자신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계속 생각하는 중이고, 컴퓨터 앞에서 풀리지 않았던 그 문제는 엉뚱하게도 양치를 하던 도중 문득 해결됩니다. 소설가는 입을 제대로 헹구지도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막혔던 장면의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갑니다. 손에 묻은 비누 거품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쓴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그러니 작가들의 자기소개에는 일종의 다짐이나 선언, 결심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소설가'라는 단어에 갇힌 명사가 아닙니다. 이 지구 어딘가에는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 화석 같은 소설가도 있겠지만, 저는 여전히 끓어오르는 활화산처럼 내면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지금 제가 이 글 제목의 절반을 설명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반, '앉아 있다'는 건 뭘까요?
뭔가를 쓰려면 일단 앉아야겠지요. 물론 앉아 있는 것은 건강에 그리 좋은 자세는 아닙니다. 요즘은 허리 건강 등을 이유로 서서 업무를 보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래도 '책상 앞에'라는 말에는 '앉다'라는 동사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작가와 책상, 그리고 의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앉아 있다'는 표현은 종종 욕이나 경멸, 저주와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소설가로서는 몹시 불쾌한 말이지만, 사전에 따르면 '소설(을) 쓰다'는 '지어내거나 거짓말을 한다'는 뜻을 지닌 관용구라고 하는데요. 여기에 '앉아 있다'를 붙이면 더욱 모욕적인 문장이 완성됩니다.
뭐라고? 소설 쓰고 앉아 있네.
저는 좀 더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방식으로 이 문장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지병(심각한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으로 병원을 다니게 된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글쎄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병을 고치려면 두 가지를 조심하시면 됩니다. 첫째는 오래 앉아 있지 말아야 하고요, 둘째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해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실 리 없는 의사 선생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인지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어요.
"오래 앉아서 스트레스받는 게 제 직업인데요?"
선생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진료실을 빠져나오면서 다짐했습니다. 언젠간 글쓰기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면 그 글의 제목은 '소설 쓰고 앉아 있네'로 해야겠다고요.
자, 바로 그 제목이 적힌 글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볼까요.(진짜 감으시면 안 됩니다. 언제까지나 비유니까요. 메타포!) 우리는 지금 햇살이 비스듬히 비껴들어오는 한적한 카페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아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빛이 데워놓은 미지근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각자의 취향에 맞는 작은 디저트 — 저는 레몬 아이싱이 올라간 마들렌으로 하겠습니다 — 도 보이네요.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당신은 제가 쓴 이 글을 읽고 무언가를 막 질문하려는 참입니다. 저는 알고 보면 썩 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꽤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입니다. 학생들이 적어준 익명의 강의 평가에 따르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신이 무엇을 묻든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소설을 쓰는 제가, 여기 앉아 있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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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