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이럴 거면 도그지어 왜 합니까?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340회) 『제법 엄숙한 얼굴』,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책임'감을 가지고 '어떤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죠. '어떤,책임' 시간입니다. (2023.05.11)
불현듯(오은) : 이번 주제는 '이럴 거면 도그지어 왜 합니까?'입니다. 도그지어는 개의 귀처럼 책 모서리를 접는 것을 일컫는 용어잖아요.
프랑소와 엄 : 저는 책을 깔끔하게 보는 편이 아니에요. 도그지어도 많이 하고요. 오늘 가지고 온 책은 도그지어에 밑줄도 많이 친, 심지어 인덱스도 많이 한 책이에요.
캘리 : 저는 책을 진짜 깨끗하게 보는 편이거든요. 메모를 해야 되면 다른 데다가 하고요. 도그지어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때는 그런 도구가 없을 때예요. 그렇지만 오늘 소개할 책은 그냥 접자, 이거는 내가 평생 볼 책이다, 생각했어요.
지하련, 임솔아 저 | 작가정신
이 책의 시리즈 소개를 먼저 하고 싶은데요. 『제법 엄숙한 얼굴』은 작가정신 출판사의 <소설, 잇다>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입니다. 이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서 함께 읽는 시리즈예요. 『제법 엄숙한 얼굴』은 지하련이라는, 1940년에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단편 소설 네 편, 그리고 임솔아 작가님의 소설 한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수록되어 있어요.
저희 이 시리즈를 볼 때 생기는 묘한 마음이 있어요. 근대 여성 작가라고 말할 때 쉽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거든요. 사실 작품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탁월하고, 선구적이기도 하고요. 문학적으로도 정말 높은 성취를 이룬 부분들이 있어서 감탄하면서 작품을 읽게 되는데 '이렇게 몰랐다니?' 생각하게 되는 거죠. 세계문학전집 같은 시리즈에서 영미권이나 서구의 근대 문학은 많이 읽잖아요. 당장 얘기할 수 있는 작가들의 이름도 많이 떠오르고요. 그런데 김명순, 백신애, 지하련 같은 작가들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들어봤을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하련 작가는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어요.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요. 1946년에 발표된 소설 『도정』에 이르러서는 "8.15 이후 국내에서 발흥한 민주주의 운동에 있어서의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작품을 써왔던 작가입니다. 그런데 지하련 작가가 우리에게 더 알려진 것은 시인 임화의 아내라는 사실입니다. 임화의 사상적 조력자였다는 정도로만 얘기가 되어 왔던 거죠. 게다가 해방 이후에 월북을 하면서 우리에게는 더욱 알려지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부장제 속에 사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살지 계속 고민하는 작품을 쓴 동시에 식민지하 남성들의 허위의식 등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작품 속에 담아냈어요. 뿐만 아니라 광화문, 효자동, 청운동 근처에 풍경들을 담은 묘사들도 있거든요. 우리가 잘 아는 서울 광화문의 풍경을 거의 100년 전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거죠. 광화문 앞에 전차가 다니고, 총독부 건물이 있는 풍경 말이에요. 그런 장면을 읽는데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어요.
임솔아 작가님의 소설과 에세이도 정말 재밌거든요. 지하련이 시인 임화의 아내로 더 많이 알려져서 아쉽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임솔아 작가님의 에세이는 심지어 시인 임화의 문장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쓰셨어요.
이 지면에 임화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 것이 맞는 걸까. 적어도 이 지면은 오직 지하연 작가에 대해서만 적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임화 시인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지하연 작가가 그늘에 가려져 있던 시간까지 내가 기억해야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 명의 작가가 그늘에 가려진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지 못하는 독자에게도 그늘은 함께 드리워진다.
그러면서 만약에 지하련의 문장을 먼저 만났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시는 거죠. 그런 생각을 독자로서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나마 그 시기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조금씩 재조명 되고 있는 흐름이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규식, 김소영, 김형진, 배경내 저 | 후마니타스
<나의 ○○○> 시리즈 첫 번째 책이에요.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는 '나의 이동권'이 키워드가 되는 것이고요. 이 책은 한 개인의 생애사, 그러니까 '이규식'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 책인 동시에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장벽, 그리고 차별의 그물망 같은 것들이 촘촘하게 드리워진 책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개인사지만 한국 장애 인권 운동사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이규식 작가님은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에요.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살아온 시간을 기록하고 사회를 해석한 최초의 책이니 아주 의미도 큰 책입니다. 그동안 언어화된 적 없고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지도 않은 뇌병변 장애인이 내는 목소리의 공백이 비로소 메워지는 출발점을 알리는 책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구술을 한 이규식 작가님뿐 아니라 이것을 받아 적고 작가님의 말씀이 사실 관계에 맞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작가님께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세 분의 공이 없었으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듣고 적은 사람'이라고 해서 김소영 님, 김형진 님, 배영래 님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요. 이 세 분도 공동 저자라고 생각해요.
이규식 작가님은 1969년 8월 5일에 2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경기를 하고 몸이 안 좋아지게 된 거예요. 그럴 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집 팔고, 땅 팔아서 유명하다는 병원들과 한의원, 심지어 기 치료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는 일이었죠. 그렇지만 치료가 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책에는 그러면서 장애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이규식이 탄생하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어요.
여러 가지 계기가 있겠지만 제일 큰 계기는 전동 스쿠터를 선물 받은 일이에요. 이동할 수 없던 사람이 이동할 수 있게 된 거잖아요. 이 경험이 아마도 이규식 작가님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결절 중에 하나,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한 지점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요. 작가님은 '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처음으로 품었던 순간이었다고 말씀하세요.
아마 지금 누군가가 다시 나에게 공동체 혹은 시설로 돌아갈 거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대답은 '아니오'다. 가끔 비탈길에 휠체어가 넘어질 뻔도 하고, 신호를 잘못 봐서 사고도 날 뻔하고, 돈이 없어 굶을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게 나의 선택이고 나의 자유다. 주는 것만 먹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과를 아무 의미 없이 하기보단 다소 위험하더라도 자유가 있는 지금이 훨씬 좋다.
스쿠터를 타고 가다 우연히 '노들야학'을 가게 되고요. 거기서 장애운동의 멘토가 된 박경석 님을 만나면서 삶의 물줄기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거의 페이지마다 도그지어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의 삶에 대해, 누군가의 걸음 걸음이 모여서 나아가는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이 책을 읽으면 왜 이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이런 삶도 똑같이 행복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까 고민을 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이 책을 꼭 만나보시면 좋겠습니다.
최인아 저 | 해냄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최인아 대표님의 책이기 때문이었어요. 지금 '최인아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책방 대표님이시고요. 원래는 제일기획 카피라이터로 한 30년 정도 일을 하셨죠. 책방이 지금 8~9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어요. 2020년에는 분점을 내기도 하고, 코로나 시기도 잘 극복해서 현재 아주 인기 있는 책방으로 자리가 잡혔어요. 저는 최인아책방이 잘 운영되는 걸 보면서 최인아 대표님 책이 언젠가 나올 텐데, 생각했거든요. 많은 편집자 분들이 출간 제안을 이미 했을 것 같았는데요. 드디어 신간 소식을 들었고, 안 읽을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가 최인아 대표님의 두 번째 책이에요. 첫 책은 1992년에 출간된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였는데요. 저는 이 책을 읽었었거든요. 대학생 때 헌책방을 한창 다니던 시기가 있어요. 그때 여성 카피라이터가 쓴 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엄청 강렬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 저자가 31년 만에 쓴 책인 거죠.
무엇보다 내 일의 의미를 찾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읽고 조금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평소에 자아 성찰하는 걸 좋아하고, 의미 찾는 일이 나한테 필요하지 않나, 이런 고민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거든요. 전 어떤 책을 볼 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자주 생각해요. 그냥 내가 이런 일을 했다, 이런 성과가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결과는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 나는 이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실질적으로 이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떤 도움을 얻었는지를 말하는 책이요. 그런 맥락에서 저자의 진심이 굉장히 많이 느껴졌던 책이었어요.
책을 보니까 최인아 대표님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한테 질문하는 사람 같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위해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되는지, 이런 질문을 주변 멘토한테 물을 수도 있고, 전문가나 앞서 나간 리더한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항상 스스로한테 계속 질문했던 분이시더라고요. 요즘 저의 짧은 화두가 질문이거든요. 제 스스로가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고 싶고, 또 좋은 질문을 듣고 싶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일단 좋은 질문을 하려면 그 상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죠. 그리고 내 자아가 너무 크면 상대한테 초점을 두기 힘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내가 스스로한테 질문을 많이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주지 않는 회사에서 혹은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는 상사를 모시고 일하는 분이라면 더더욱 남들이 해주지 않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 왜냐하면 실은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중요한 사람이다.
사실 일하다 보면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정말 쉽지가 않지만요.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을 잘 헤쳐 나가고 내가 발전되는 방향으로 하려면 계속 질문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저희 방송을 청취하시는 분들 중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찾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고 또 지금 놓인 상황이 어려운 분들이 계시다면 이 책을 읽으면 약간 마음이 다독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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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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