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음악과 한 보 가까워진 출판 마케팅
<월간 채널예스> 2023년 5월호
이제 플레이리스트는 시간을 보내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사람들은 1시간의 여유가 주어진다면 10곡이 수록된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대신 유튜브에서 현재 기분에 어울리는 1시간짜리 분량의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해서 듣는다. (2023.05.03)
오늘의 기분에 맞게 적당한 제목을 가진 플레이리스트를 골라 두세 곡을 듣다 보니 갑자기 책을 읽고 싶어진다. 작가가 들려주는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이 이야기에 어울릴 만한 또 다른 음악을 떠올려본다. 다음에 이어서 읽을 책은 플레이리스트 영상에 달린 추천 댓글을 보며 결정한다. 음악이 있는 우리의 모든 순간에 독서가 있다. |
이제 플레이리스트는 시간을 보내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사람들은 1시간의 여유가 주어진다면 10곡이 수록된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대신 유튜브에서 현재 기분에 어울리는 1시간짜리 분량의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해서 듣는다. '재택근무에 도움이 되는 백색 소음 같은 음악'부터 '아침에 조깅할 때 힘이 되는 음악'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듣는 포근한 음악'까지... 하루 24시간 중 어떤 순간이든 맞춤으로 재생시킬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가 준비되어 있다.
유튜브에서 플레이리스트 채널을 운영하는 선곡자는 보통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여러 곡을 고른 후 영상을 제작해서 채널에 공개한다. 그러나 곡 하나하나를 왜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라디오 DJ와는 성격이 다르다. 사람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영상의 주요 구성 요소인 제목, 배경에 흐르는 사진 또는 영상, 구독자의 댓글 등을 두루 살펴보며 선곡자가 의도한 분위기에 빠져든다. 이렇듯 인기 플레이리스트는 음악이 필요한 타이밍을 포착한다.
그렇다면 '책 읽을 때 듣기 좋은 음악'이란 무엇일까? 눈으로 글자를 따라 읽는 독자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잔잔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물론 일본 작곡가 이와무라 류타가 독서를 위해 작곡한 7개의 피아노곡으로 구성한 <리딩 투 히어(Reading to Hear)> 같은 앨범도 있다. 그러나 어떤 선곡자는 음악이 독서를 보조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책에 관심이 있는 잠재적 독자들을 향하게끔 음악을 활용한다. 노래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정서를 통해 책의 이야기에 담긴 메시지 또는 작가의 철학을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익히 알려져 있듯, 플레이리스트 채널 운영자는 영상 조회 수가 아무리 높아도 금전적 이익을 취할 수 없다. 영상 속 유튜브 광고로 인한 수익이 모두 곡을 만든 원저작자에게 돌아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수익을 원하는 플레이리스트 채널 운영자는 다양한 브랜드와 광고를 진행하는데, 그중 도서 마케팅을 원하는 출판사와의 협업도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인기 플레이리스트 채널과 출판사의 만남을 통해 도서 홍보의 새로운 판로가 생겨났다. 공식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출판사에서는 직접 플레이리스트 영상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별게 다 영감이네 #2022 #리플레이LEEPLAY
<『별게 다 영감』을 위한 선곡(일부)> 1. Baby Girl — Young Gun Silver Fox 2. Miracles — Benny Sings 3. Lancaster Nights — Charlie Burg 4. Watering the Garden — Brad Stank 5. Coconut — Benny Sings 6. Rolled Up — Benny Sings 7. You — Niall Mutter 8. Pop Therapy — Video Age 9. Weekend — Clubhouse 10. Bored — Thomas Headon, Lizzy McAlpine |
<리플레이LEEPLAY>는 '사진을 찍었던 순간에 생각나는 음악 몇 곡'이라는 채널 소개처럼, 평소 운영자가 취미로 촬영한 사진과 선곡한 음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플레이리스트 채널이다. '별게 다 영감이네'는 이승희 마케터의 에세이 『별게 다 영감』에서 연상되는 음악의 선곡을 <리플레이LEEPLAY>에 의뢰해서 이루어진 컬래버레이션 영상이다. 저자가 책 본문에서 <리플레이LEEPLAY> 채널을 언급한 것이 컬래버레이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영상 속에는 침대 위에 귤, 초콜릿 등의 간식거리와 함께 『별게 다 영감』을 읽던 중 촬영한 듯한 사진이 담겨 있다. 이 사진은 한가로운 주말의 독서 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리플레이LEEPLAY>는 이 영상을 보는 구독자들에게 최근 자신이 영감을 받은 순간에 대해 댓글을 달도록 했다. 구독자들은 퇴근 후 하늘을 보면서, 오랜만에 전시를 보러 가서 영감을 받았던 저마다의 순간들을 공유했고, 출판사는 댓글을 달아준 구독자들에게 추첨을 통해 도서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 영상은 자기 계발서 장르에 담긴 책의 메시지를 구독자들에게 복잡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의 경험을 공유하게 했다. 그저 '별것 아닌' 일이어도 영감이 될 수 있다는 도서의 메시지가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댓글을 통해 퍼져 나가게 된다. 도서의 메시지에 맞게 일관적으로 음악과 구독자 대상 이벤트가 연계되는 추세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별이 보이는 카페에서 #2021 #by the way
<『어린 왕자』를 위한 선곡(일부)> 1. Tender Loneliness — Matija Strniša 2. Butterflies — Matija Strniša 3. Natural Light — Ludovico Einaudi 4. The Mercy of the Wind — Million Eyes 5. Courage Endures — Trevor Kowalski 6. 사랑스런 추억 — 모그, 이은주 7. There Will Be Rain — Million Eyes 8. And We Walk After — Trevor Kowalski 9. You — Akira Kosemura 10. My Friend the Forest — Nils Frahm |
<by the way>는 가사가 없는 연주곡을 소개하는 플레이리스트 채널인데, 일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을 소개하는 '직원의 플레이리스트' 시리즈를 통해 입소문이 났다. '봄비를 기다렸던 고궁 박물관 직원, 가사 없는 음악' 편에서는 고궁과 어울리는 국내 작곡가들의 서정적이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곡들을 담았는데, 2023년 4월 기준 누적 조회 수가 330만 회에 달한다. '올여름 책 한 권 들고 폴란드로 떠난 박물관 직원' 편, '눈을 기다리는 독립서점 직원' 편처럼 책과 함께하는 직업인들의 현장에 어울리는 음악도 있다.
이 채널에서는 '북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책과 연계된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한다. '북클럽' 시리즈에 공개되는 영상은 출판사로부터 제작비를 지원 받아 만들어진다. 책을 먼저 읽어본 <by the way>가 도서에서 연상된 음악을 선곡한 영상을 최초 공개하고, 중간에 구독자들에게 공통 질문을 던진다. 실시간으로 접속한 구독자들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공유하며 음악을 듣는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다룬 편에서는 "어렸을 적 『어린 왕자』를 봤던 때의 기억은?", "'어린 왕자' 혹은 '어린 나'를 만나게 된다면 해주고 싶은 말?"과 같은 질문들을 나누었다. 채널에서는 영상이 공개되기 2주 전에 선정 도서를 안내하기 때문에, 구독자는 원한다면 각자 책을 구매해 읽은 후 실시간 채팅에 참여할 수 있는 셈이다.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이 같은 시간에 음악을 중심으로 두고 비대면으로 모일 수 있는 사례다.
#여름날 바닷가 서점에서의 한 시간 #2022 #어크로스
<동아서점 방문객을 위한 음악(일부)> 1. Wave(Live/1986) — Gal Costa, Antônio Carlos Jobim 2. Doralice(Mono Version) — Stan Getz, João Gilberto, Antônio Carlos Jobim 3. Blue Hawaii — Lisa Ono 4. I’ve Got My Love to Keep Me Warm — Teddy Wilson 5. My Heart Stood Still — Chet Baker 6. East of the Sun(West of the Moon) — Diana Krall 7. Gia Ena Tango — Haris Alexiou 8. Les Secrets Chuchotés — Renan Luce 9. North Marine Drive — Ben Watt 10. Only the Ocean — Jack Johnson |
강원 속초에서 1956년에 개점해 3대째 동아서점을 운영하는 김영건 대표의 에세이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출간을 기념해 출판사 어크로스에서 제작한 플레이리스트다. 출판사에서 직접 52분간 촬영한 동아서점 영상 속에는 바람에 모빌이 흔들리고 서점 창문 너머 도로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걸 볼 수 있다. 마치 동아서점에 들러 책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노래들은 모두 동아서점에서 서점 방문객들을 위해 선곡했다.
이 영상을 보는 구독자들은 댓글로 당장 속초 바닷가에 갈 수 없지만 대리 만족을 느꼈다거나, 오는 여름의 여행 계획을 공유하기도 한다. "바닷가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느긋하게 서점으로 나가 오후를 보낸 후 다시 해 지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정을 그려보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라는 플레이리스트 제작자의 바람과도 꼭 닮은 플레이리스트다. 주요 지명이나 장소가 등장하는 도서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때 영상 배경으로 장소를 넣으면 책을 읽을 때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 공간이 그려지는 효과가 있다.
#내게 여운을 주는 문학 작품 #2021 #때껄룩TAKE A LOOK
<여운을 주는 책을 읽을 때 듣기 좋은 음악(일부)> 1. Yours — 데이먼스 이어 2. 낭만젊음사랑 — 이세계 3. 그 많던 일기는 그저 글자가 되고 — 우리같은사람들 4. 영웅은 어쩌다 평범한 인간이 되었나 — 우리같은사람들 5. 너는 나의 문학 — 박소은 6. Nite — 데이먼스 이어 7. 열기구 — SURL 8. 방백 — 김여명 9. 네가 사랑한 것들을 기억할게 — 알레프 10. 모든 것은 그 자리에 — 히피는 집시였다 |
<때껄룩TAKE A LOOK>은 국내 가요와 해외 팝송을 두루 소개하는 플레이리스트 채널이다. 그중 '내게 여운을 주는 문학 작품'이라는 제목의 영상에는 2023년 4월 기준 7천여 개의 댓글이 달렸고 누적 조회 수는 211만 회에 달한다. 파도를 배경으로 한 사진과 함께 10곡 내외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각각의 노래 제목을 알려주는 정도가 영상의 전부다. 구독자들은 '여운'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자신이 좋아하는 책 하나를 골라 소개하고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댓글을 마무리한다. <때껄룩TAKE A LOOK>이 특정 도서를 추천하는 게 아닌데도 구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책을 추천하는 것이다.
이 영상의 인기에 힘입어 공개된 후속 영상의 제목은 '인디 음악으로 전하는 문학 작품'인데, 이 영상에 달린 어느 구독자의 댓글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곧 이 영상은 모든 사람을 위한 작고 따스한 도서관이 될 겁니다."
음악이 흐르는 영상 하나로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는 공간 또는 커뮤니티가 생긴 셈이다. 플레이리스트 제작자라면 구독자를 댓글에 참여시킬 수 있는 작은 장치를 제목에 포함하는 방법을 참고할 만하다. 채널 운영자는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먼저 여는 사람일 뿐이고, 구독자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채널에 대한 충성도는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천문학자가 추천하는 노래 들어봄? # 별 보러 가는 길의 노래 #2021 #문학동네
<심채경 천문학자가 고른 음악> 1. 길(시그널 OST) — 김윤아 2. 달 — 한영애 3. 바람이 불어오는 곳 — 김광석 4. RENDEZ-VOUS — 임현식(비투비) 5. 별 보러 가자 — 적재 6. Space Oddity — Chris Hadfield 7. Fly Me to the Moon — Frank Sinatra |
'책며드는(책에 스며드는) 책플리'는 문학동네에서 제작한 인터뷰 시리즈다. 여성 천문학자로서의 삶을 담아낸 에세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쓴 심채경 천문학자는 자신의 직업이 별 보기 좋은 명소를 추천해 줄 것 같은 이미지를 가졌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상을 통해 별 보러 가는 길에 듣기 좋은 임현식(비투비)의 '랑데부(RENDEZ-VOUS)', 적재의 '별 보러 가자' 등을 소개한다. 최은영 작가는 4대에 걸친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 『밝은 밤』을 쓰면서 작품의 테마송으로 지정해 두었던 핫펠트의 '나란 책(Read Me)'을, 한강 작가는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면서 제주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자주 들었다던 조동익의 '럴러바이(Lullaby)'를 소개한다. 이 시리즈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후원을 받아 제작됐고,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세계 독자들을 위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로도 자막을 지원한다. 작가의 취향에 집중한 영상 인터뷰는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을 폭넓게 감상하는 작가에 대해 독자가 더 관심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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