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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의 한 발 느린 집사람] 좌표를 옮기는 사랑

<월간 채널예스> 202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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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건 겁이 난다. 겁이 나는 동안 조금은 상기된 채로 점잖고 신사이고 이상한 아빠가 낳은 나는 어떤 아빠가 될지도 상상해 본다. (2023.04.11)


손바닥만 한 화면에는 벗겨진 정수리와 전등만 보인다. 왼쪽 눈썹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곧이어 엄마 아빠의 눈코입이 보인다. 왜곡 때문에 둘의 얼굴은 위아래로 길지만 그들을 즉각 알아볼 수 있다. 익숙한 내 낯의 일부가 거기서 보이기 때문이다.

먼 집에 있는 모부를 만나는 방식이다. 화상 전화. 페이스 타임.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얼굴을 본다. 이제 60대 후반이 된, 디지털 리터러시 없는 미숙과 종찬은 이내 자기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졌는데도 열심히 말한다. 밥은 뭐 먹었냐며. 춥지는 않냐며. 때때로 노래도 불러준다.

한국을 떠올리면 거기 있는 집의 이미지는 미숙과 종찬이었다. 그렇다, 집은 나에게 얼굴이었다. 그중 오늘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아빠에 대해 쓰기로 한다.

종찬은 점잖은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거의 항상 정장을 입고 다닌다. 예상을 빗나가는 넥타이 조합과 함께. 그리고 어딜 가든 중절모를 쓰고 늘 주머니에는 빗이 있다. 비록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지만 가르마를 잘 타기 위해서다. 사람들을 만나면 중절모를 벗어 한 손에 들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 나의 친구들에게도 똑같이 한다. 친구들은 당황하며 더 정중하게 고개 숙인다.

그러다 운동 갈 때면 영문 모를 네온색 바지와 셔츠를 입는다. 엄마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같이 화려하게 입는다. 어쩌면 너무 부끄럽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둘 다 왜 그리 입는지 굳이 묻지 않는다. 나도 중년이 되면 자녀가 이해 못 할 코드로 입게 될까? 아빠도 서른 살이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옷차림을 보며 멀다고 느꼈을까?

종찬은 신문을 여덟 개씩 읽는다. 크고 작은 세계의 기술, 문화의 움직임 등을 스크랩하며 따라간다. 내가 미국 시카고에 거주할 때 종찬은 가끔 구글맵을 켜 다운타운을 지나 도로를 지나 나의 동네를 방문했다.

"아들, 나 지금 시카고에 왔어."

마우스를 옮겨 빌딩 좌표 앞에 자신을 놓고 전화한 적도 있다. 

그의 러블리한 너드함과 기계 공학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역사는 관련이 깊다. 하루는 가족끼리 도자기 공방에 갔다. 공예 경험이 없는 엄마, 나, 동생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며 컵을 만들었다. 종찬은 점토를 집어 들며 말했다.

"열을 가하면 수분이 빠지니까 15%는 크게 만들어야 해. 점토에도 수축률이 있거든." 

그러다 원주율 따라 잘라야 하는 점토의 길이를 계산하기도 했다. 그런 숫자들이 얼마나 본능적으로 튀어 나오던지. 아빠는 아빠가 좀 다른 거 알고 있으려나.

휴대폰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니? 태양열 전지가 어떤 효율로 작동하는지 아니? 반도체가 어떻게 그리 얇게 만들어지는지 들어봤니? 물성과 원리에 그는 관심이 많다. 고장 난 기계를 툭하면 분해해 몇 시간씩 고치기도 하고 한나절씩 논문을 읽기도 한다. 공학도로서의 모습일 텐데,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 인간인지를 신기하게 생각할 뿐이다. 컵과 접시, 형형색색의 포크, 신발과 옷을 열렬하게 모으는 나를 보며 아빠도 똑같이 생각했겠지.

나는 종찬의 힘 있고 정갈한 글씨체를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그는 삶의 중요한 텍스트를 늘 기록해 둔다. 종찬의 서재에서 그가 예전에 쓴 노트를 발견한 적이 있는데, 젊었을 때 삶의 목표를 신앙, 사랑, 교육 등 카테고리별로 나누어 전부 기록해 두었다.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30년 전부터 오늘까지 종찬은 매년 같은 다이어리와 플래너를 산다. 일정과 그날그날 떠오르는 사유로 그것들은 빼곡해진다. 그 기질이 나에게 넘어와 지금의 내가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종찬은 내가 발표하는 글이나 사진에 대해 매번 생각을 정돈해 자신이 느낀 구석을 메시지로 자세히 남겨둔다.

종찬은 내가 성장하며 만난 다른 남자들과 비슷했고 또 달랐다.

한여름, 호프집 야외 테이블을 지나갈 때마다 한껏 취한 채 어린이에게 괜히 소리 지르던 남자들. 그게 나에게 중년 아저씨의 이미지였다. 종찬은 이상했지만 그런 식의 힘 부리기를 하진 않았다. 외식하면 음식이 맛있다고 종업원에게 말하는 걸 잊지 않았고 누가 싸움을 걸어와도 웬만하면 져주었다. 점잖은 방식으로 아저씨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는 보여주었다.

일요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종찬이 좋아하는 LP나 카세트를 전축으로 튼 채 청소하던 소리였다. 주말인데, 아침 9시부터 클래식에 잠을 깨면서 당시에는 좀 짜증이 났다. 아빠도 피곤할 텐데 왜 이리 일찍 깰까. 왜 하필 그때 집 안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할까.

지금 생각하니 다행이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우리 그리고 적잖은 종찬의 또래 친구들에게 지루했을 장르지만, 그가 섬세한 음악을 애정했다는 사실이 좋다. 그가 좋아하는 루틴이 있었다는 사실도 안심된다. 모부이기 전에 기쁜 개인으로 지냈다는 거니까. 한동안 나는 모부가 되면 자기 생활이 없어지며 창작자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점차, 아무도 모르게 조용한 파멸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중년 창작자들을 만났고 이제는 50, 60대의 부모들이 얼마큼 전성기일 수도 있는지 잘 안다.

한편, 쇼핑할 때면 그는 끈기 있다. 다정하지만 집요하게 깎는다. 아니 뭘 저렇게까지... 그런 종찬이 부끄러워 나와 동생은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 선다. 놀랍게도 그는 매번 믿을 수 없는 가격에 물건을 사 온다. 어떤 남자들은 수치스럽게 여길 알뜰함이다.

종찬은 수다스럽지 않다. 어느 자리에서나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뚝뚝하진 않다. 어떤 침묵은 주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데 종찬의 절제된 언어는 그렇지 않다. 공기에 깔려 있는 애정을 감각할 수 있달까.

만으로 열아홉이 되던 해 나는 타국으로 홀로 이주했다. 멀리서도 그는 비슷하게 마음을 전했다. 잘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느낄 수 있었다. 바쁠까 봐 전화를 일부러 잘 하지 않거나 부담을 주지 않게끔 조심히 살피며 마음 쓰는 식이었다. 그러다 내가 전시 사진이나 발표한 글을 보내주면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상세하게 장문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사랑을 말하는 일에 부끄러워 않는다는 게 고마웠다. 그는 우리에게 편지를 자주 써주었다. 그리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행동하는 방식으로 다감했다.

그러다 우리는 어긋나기도 했다.

석사 중반까지 기계 공학을 공부한 나는 더 이상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원하는 일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시 쓰고 사진 찍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로 했다. 종찬은 그 소식에 절망했다.

긴 시간 교단에서 일했고, 자식들도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길 원하던 아빠는 기계 공학을 놓지 않길 희망했다. 모든 노동은 수고스럽지만 나는 일할 때마다 내 선택을 다행이라고 느끼고 싶었다. 계속 더 잘하고 싶은 일이길 바랐다. 생업의 현장에서도 정확하게 기쁘고 싶었다. 크고 작은 충만감이 그런 데서 온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대척점에서 우린 왕왕 얼굴을 붉혔다. 두 해가 지나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유독 직업에 있어 억척스러웠던 아빠도 나의 새 정체를 축하해 주었다. 발표하는 작업도 첫 번째로 읽어주었다.

시간이 지났다. 종찬은 마침내 은퇴를 했다. 부지런히 노동해 온 그가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만 하며 지내길 소망했다.

어느 날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네 아빠 말이야... 시 수업 들으려고 알아보던데."

평소 시 독자가 아니었던 그는 시인이 된 아들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고. 평생 교육원에 수업도 끊어두었다고. 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얼까. 그 대상이 이동한 지도를 따라 어렴풋이라도 함께 이동하는 거.

연인이자 남자로서도 그는 적극적이었다.



하루는, 어려운 이별을 하고 마음고생하던 내가 새 연인을 종찬과 미숙 집에 데려갔다. 이게 웬일. 그들 집에서 처음 보내는 밤이 초라하지 않게 우리 방에 무려 침대를 미리 사두었다. 나중에 미숙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괜찮은 침대를 사기 위해 매장을 세 군데나 갔다는 거다. 돈 아끼려 자기 구두는 10년, 20년씩 신으면서 좋은 침대를 선물한 종찬이 고마웠다. 그가 연인과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제야 남자로서의 종찬을 떠올린다. 집에서 미숙에게 후하게 표현하는 모습. 좋은 것을 축소하지 않고 좋다고 말하는 모습. 사랑이 늘 중요했던 사람이 사랑에 힘을 얹어줄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생각. 모부로부터 그런 응원을 받는 게 고맙고 쑥스럽다.

연인으로서 그의 훌륭함은 싸우고 화해하는 모먼트에도 인상적이었다. 어느 여름, 가족 넷 모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 미숙과 종찬은 다투었고 미숙은 극장에 가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회유가 불발되고 종찬 나 동생 셋만 집을 나섰다.

티켓을 사고 입장을 기다리는데 종찬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미숙에게 장문의 문자를 쓰고 있었다.

당신이 함께 오지 않으니 

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싶소 

이걸 가장 함께 보고 싶은 이는 

당신인데 어디서 무얼 하고 있소

긴 소네트 시편의 형식이었는데 거의 천 년 기다린 사랑의 고백이었다. 역시나 과하다고 생각했다. 연인이 이렇게까지 긴 시간 사랑을 고하는 게 미숙에게는 어떻게 남아 있을지. 가늠해 보게 된다. 돌아보니 미숙도 지금까지 비슷하게 표현을 많이 한다.

집 밖에서 훌륭한 남성을 만난 경험은 많지 않았다.

남고를 다녀서 그랬는지 고등학생 때는 원초적인 힘 겨루기가 관계를 지배했다. 늘 긴장한 채로 다녔다. 약해 보이면 궁지에 몰리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다들 일부러 센 척도 했다. 어떤 폭력성은 자연스레 답습된다. 섬세함은 흠처럼 놀림받고. 눈물을 치부처럼 여기고 참는 건 그중 하나일 뿐이다.

종찬은 드라마 볼 때마다 우는 사람이었다. 지나고 보면 여러 종류의 남자들이 있었다. 캐릭터 그리던 애. 목도리 뜨던 애. 각종 코스프레를 좋아하던 애. 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소수였을 뿐. 납작하게 그려져 온 남성성 때문에 우리는 꽤 많은 스스로의 정체를 오해해 왔다. 어떤 남성이고 싶은지 나는 다시 결정하고 있다. 계속 정정하는 중이다.

얼마 전, 내가 고양이 둘을 아이처럼 안고 있는 사진을 본 아빠는 나에게 아빠가 거의 다 되었다고 했다. 딸이나 아들이 생기면 더할 거라고. 새로운 세계가 열릴 거고 어느 시절보다 좋을 거라고.

아마도 그건 자신의 부성애에 대한 힌트이자 고백이기도 했을 거다. 고양이만큼 작은 나를 키웠던 시간이 좋았다는 말이기도 했을 거다. 사랑은 그렇게 흐르고 되풀이된다.

여전히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건 겁이 난다. 겁이 나는 동안 조금은 상기된 채로 점잖고 신사이고 이상한 아빠가 낳은 나는 어떤 아빠가 될지도 상상해 본다. 

다음 집이 될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만날 나를 펼쳤다 접으며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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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훤(시인, 사진가)

시인, 사진가. 시집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양눈잡이』를 썼다. 사진 산문집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를 쓰고 찍었으며, 산문집 『사람의 질감』을 집필 중(2023년 출간 예정)이다. 미국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사진학 석사를 마쳤고 2019년 큐레이터 메리 스탠리가 선정한 '주목해야 할 젊은 사진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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