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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술 맛 멋] 한 잔 술이 주는 기쁨

1화 : 동해 바다와 설악산을 품은 우리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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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것 역시 지역 탁주와 소주였다. 지역의 농산물로 빚은 탁주와 청주, 그리고 그것을 증류해 얻은 증류식 소주를 속초에서도 맛보고 싶었다. (2023.02.07)


소설가 김혜나가 전통주를 음미하며, 
소설가의 일상, 술의 향과 맛, 시와 소설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격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작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다. 자기만의 방을 노래한 버지니아 울프처럼 소설가인 나 또한 오로지 글쓰기를 위한 방이 필요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작업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주로 서너 달씩 머무를 수 있는 국내외 예술가 레지던스를 이용해왔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설악산과 동해를 볼 수 있는 강원도 속초에 작업실을 구했다.

작업실은 속초 동명항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해 있어 매일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해가 수평선 사이 구름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명상이 됐다. 가만히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요가를 수련하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나가는 일상이 고요하게 이어졌다.

새벽녘 붉은 자태를 뽐내며 떠오른 해가 중천으로 넘어갈 즈음이면 샛노란 빛을 쏟아냈다. 해수면 위로 반사되는 태양의 모습이 술잔처럼 둥글어,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다가 냉장고에서 '동해소주' 한 병을 꺼내 해처럼 둥근 술잔에 솔솔 따라냈다.

작가와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난서증에 시달리던 헤밍웨이가 럼주로 만든 칵테일 다이키리와 모히토를 마시며 『노인과 바다』를 쓰기 시작한 일화는 문학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만큼 유명하다. 그뿐 아니라 테네시 윌리엄스, 존 치버, 레이먼드 카버, 찰스 부코스키 등의 작품에도 술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작가들은 왜 이토록 술을 사랑할까?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아무래도 기혈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게 마련이라 그것을 흘려보내줄 술 한 모금이 절실해지는 것은 아닐까? 오로지 홀로 이어가는 글쓰기의 순간에 마시는 한 잔 술은 작가에게 가히 노동주이자 소울메이트라 칭할 법했다.

소설을 쓰며 여러 지역을 떠돌아 온 나 또한 적잖이 술을 마셔왔다.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술을 마셔보는 습관도 자라났다. 일본에 머물 적에는 선술집에서 꼬치구이를 시켜둔 채 사케를 마셨고, 태국에서는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럼주 '쌩솜'과 '홍텅'을 사 와서 소다수에 섞어 마시기도 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물보다 싸게 파는 요리용 와인도 맛이 훌륭해 자주 사 왔고, 미국에서는 주로 버번위스키와 맥주를 홀짝이며 소설을 써나갔다.



속초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것 역시 지역 탁주와 소주였다. 지역의 농산물로 빚은 탁주와 청주, 그리고 그것을 증류해 얻은 증류식 소주1)를 속초에서도 맛보고 싶었다.

속초 시내 마트와 식당, 주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지역 술은 '바다 한 잔 동해소주'였다. 흔히 '동해소주'라고 부르는 이 술은 초록색 병에 담긴 대개의 희석식 소주와 달리, 투명한 유리병에 푸른 동해바다를 형상화한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이 술을 마트에서 한 병 사와 맛본 뒤 신기할 정도로 깔끔한 맛에 깜짝 놀랐다. 지역을 대표하는 소주라고 한들, 주정2)에 감미료를 혼합해 라벨만 달리한 희석식 소주가 대부분인데, 동해소주는 증류식 소주 원액과 해양 심층수를 첨가해 맛이 굉장히 담백했다. 물론 주정도 첨가되어 있다 보니, 쌀소주 특유의 풍미를 온전히 느끼기는 다소 부족했으나, 영금정에 부딪쳐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이미지가 온몸 가득 차오르는 청정한 소주라고 칭할 수 있었다.

작업실에 앉아 한낮의 바다를 바라보며 들이켜는 동해소주 한 잔이라니, 삶에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싶었다.

하루는 속초 중앙시장에 있는 마트로 가서 강원지역 명주라는 '설이소주'를 한 병 사 왔다. 소주 한 병의 가격이 1만 6천 원으로 결코 싸다고 할 수 없지만, 에탄올 함량 40퍼센트의 증류주 원액만 담아낸 술이라서 결코 비싼 값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설이소주 또한 반투명 유리병에 제품명만 깔끔하게 담아낸 디자인이라 그 맛이 어떨지 무척 기대됐다.

나는 점심시간을 기다려 식사를 하면서 설이소주를 한 잔 따라보았다. 그리고 한 모금 살짝 넘기자마자 "와, 맛있다" 소리가 대번에 나왔다. 설이소주는 초록병 소주와는 다른 증류주 특유의 향과 풍미를 가지고 있었다. 알코올의 독한 향과 맛은 없이 은은한 꽃향이 돌면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증류주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것이었다. 술을 한 모금 더 입 안에 머금어 보니 다달하면서도 무한한 부드러움이 혀를 감싸고 돌았다. 이 달큰함과 부드러움은 인공적인 감미료가 아닌 쌀의 농도에서 나오는 맛과 질감으로 다가왔다. 에탄올 함량이 40퍼센트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순하고 부드러워 내내 감탄하며 마실 수 있었다.



설이소주의 단맛과 부드러움은 결코 깊거나 무겁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동해소주가 영금정에 부딪히는 새하얀 파도와 같은 힘이 있었다면, 설이소주는 부드럽게 살랑이는 한낮의 햇살과 바람을 머금은 술 같았다.

속초에는 봄에도 눈이 온다고 했던가. 눈이 나리는 4월의 한낮, 벚꽃 잎 가득한 영랑호 범바위에 올라 설악산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즐기고 싶은 술이 바로 설이소주가 아닐까 싶다.

문득 다른 지역을 대표하는 한국 술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국가 무형 문화재와 식품 명인이 생산한 전통주 또는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해 빚은 지역 특산주라면 특정 지역에 직접 가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어서 이 또한 애주가들에게는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구매에 앞서 여러 전통주에 대한 온라인 리뷰를 찾아보고 동영상을 검색해 보았다.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탁주와 약주, 그리고 증류주를 종류별로 주문하고, 그에 어울리는 안주를 만들어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졌다.

우리 술은 같은 주종이라 해도 맛과 향이 저마다 천차만별이라 조금씩 음미하며 마시는 재미가 빼어나다. 그러다 보니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빠르게 취하는 일이 오히려 잦아들고, 우리 술의 다양한 색, 향, 맛, 그리고 여운을 만끽하며 한 잔 술이 주는 기쁨에 서서히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1) 전분질 원료를 발효해 단식 증류한 술. 대표적으로 화요, 일품진로, 안동소주 등이 있다.
2) 연속식 증류로 얻은 순도 85퍼센트 이상의 식용 알코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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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혜나(소설가)

소설가. 장편 소설 『제리』로 제3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청귤』, 중편 소설 『그랑 주떼』, 장편 소설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이 있다. 제4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요가 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뒤 인도 마이소르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고 요가 철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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