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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내의 작가 피정] 밀크티

노시내의 작가 피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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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의 독특한 향미, 우유와 설탕에서 얻는 즉석 열량, 카페인이 주는 각성 효과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피지배자들은 밀크티에 제대로 중독되고 말았다. (2022.11.25)


피정(避靜),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번역가 노시내는 지난봄 취리히로 40일간의 피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소란합니다. 26년 동안 6개 도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 음식들, 언어들이 피정의 내밀한 시공간을 흔듭니다.

〈노시내의 작가 피정〉은 그 기억과 인연의 일기이자 그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삼아 번역해낸 글입니다.


ⓒ 노시내
파키스탄 차이에 들어가는 마지막 재료는 향신료 카다멈이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밀크티를 끓일 때도, 밥을 안칠 때도 카다멈을 한두 개씩 넣는다.
나에게 카다멈의 향은, 파키스탄의 향이다.

벌써 사흘째 제대로 못 잤다. 통증보다도 숨쉬기가 불편해서다. 수술 후 부어오른 목이 호흡 기관에 영향을 미쳐서, 누워 있으면 숨이 막혔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특정 자세에서 기도가 막히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잘 때는 그게 어렵기 때문에 갑자기 숨이 막혀 깨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마침 어제 마취과 의사에게 내 몸 상태를 묻는 전화가 왔었다. 호흡에 장애가 있다고 호소했더니, 그쪽은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므로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따로 문의해보라는 말과 함께, 일단 베개를 여러 개 쌓아 머리를 높이 올리고 비염 치료용 스프레이를 사용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했다. 그 말대로 해보았으나 증상은 전혀 경감되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너무 지친 나머지 갖고 있던 진정제 한 알을 반으로 쪼개 먹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통증은 진통제로 조절할 수 있어도, 호흡 장애는 미각 장애나 턱관절 장애 같은 다른 편도 수술 부작용과 마찬가지로 참을성 있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신문이라도 읽으면 잠이 올까 싶어 병원에서 가져온 신문을 읽다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말았다.

간신히 세 시간 정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좀비 상태로 일어나 아침에 찬 우유를 조금 마셨다. 여전히 비린 맛이 났지만, 그래도 스위스 우유의 깔끔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서서히 느껴지는 것을 보니 몸이 조금은 회복된 모양이다. 한때는 스위스 우유가 이제까지 마셔본 우유 중 제일 맛있다고 생각했으나 파키스탄에 가서 생각이 바뀌었다. 파키스탄 우유는 스위스 우유보다 진하고 깊은 감칠맛이 났다. 지방 함량의 차이가 원인인가 싶어 확인을 해봤으나, 스위스 일반 우유의 지방 함량은 제품에 따라 3.5~3.8퍼센트 정도이고 파키스탄에서 내가 늘 사 마시는 우유는 3.6퍼센트이니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파키스탄 우유는 진한 크림처럼 농후하다.

우유가 그리 맛있으니 우유가 들어간 음료도 더불어 맛있어진다. 덕분에 평소에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던 내가 파키스탄에서는 나도 모르게 자꾸만 우유를 넣는다. 밀크티도 예전에는 그걸 무슨 맛으로 마시나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파키스탄에서 밀크티를 맛본 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일부러 찾아 마신다. 우유가 맛있고, 또 파키스탄에서 파는 홍차 잎이 맛있으니 밀크티도 자동으로 맛있어진다.

파키스탄을 비롯해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 널리 마시는 밀크티의 원래 명칭은 '마살라 차이'(masala chai)다. 차이는 중국어 '차'에서 유래한 것이고 마살라는 향신료를 뜻하니, 향신료가 들어간 차라는 뜻이다. 보통은 마살라를 생략하고 그냥 '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현지에서 누가 "차이줄까?"하고 물을 때 "네"하고 냉큼 답하면 다름 아닌 밀크티가 나온다. 차이는 과자나 케이크 같은 단 음식과 함께 먹을 뿐만 아니라 사모사 튀김이나 병아리콩 샐러드 같은 짭짤한 음식과도 함께 즐긴다. 자주 접하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밀크티와 짭짤한 음식과의 조합은 아직도 내 입맛에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식당이나 시장에서 파는 밀크티는 지나치게 달아서 밀크티가 마시고 싶어지면 직접 만든다. 현지인에게 전수받은 레시피를 따르되 설탕은 넣지 않는다. 사실 밀크티 레시피는 꽤 유연하다. 마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서, 이를테면 차의 맛이 얼마나 진했으면 좋겠는지, 얼마나 달았으면 좋겠는지, 우유 맛은 얼마나 났으면 좋겠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

밀크티에는 아삼티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같은 몰트향이 깊은 홍차가 적합하다. 실론티는 몰트향이 덜하지만, 다른 홍차가 없다면 대용으로 쓸 수 있다. 아주 진한 맛을 원할 때는 한 잔(200~250밀리리터)에 홍차 티백 두 개를 쓰면 되고, 순한 맛을 선호하면 한 잔에 티백 하나를 쓰면 된다. 파키스탄 가정에서는 다들 립톤티를 쓴다. 샛노란 바탕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선명한 상표명이 박힌 립톤티를 보며 나는 불현듯 추억에 휩싸였다. 어렸을 때 엄마는 이른바 '미젯집'에서 종종 립톤티를 사다 드셨다.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 때쯤이었을까. 반 친구 몇 명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엄마가 립톤티로 홍차를 끓여 예쁜 찻잔에 담아 내오신 적이 있다. 정확한 연도나 찾아왔던 친구들이 누구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도, 희한하게 당시 느꼈던 감정과 감각 몇 가지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엄마가 친구들에게 특별하고 맛있는 음료를 품격 있게 대접해주셨다는 점에 대한 흡족함, 벌써 그 나이에 느꼈던 품격에 대한 자각, 홍차를 마시니 어른이 다 된 것 같아 뿌듯했던 느낌, 우유 없이 설탕만 들어간 그때 그 검붉은 홍차의 독특한 몰트향, 달콤하고 따뜻한 액체가 목으로 넘어갈 때 느껴지던 총체적 쾌감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때는 그랬지만, 요즘 립톤티는 한국에서나 서구에서나 저렴하고 대중적인 이미지가 크고 맛도 평범해서 특별히 사랑받는 처지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맛본 립톤티는 달랐다. 오묘하고 복잡한 향미는 내지 못하더라도, 맛있는 밀크티를 만드는 데 필수인 깊은 몰트향은 다른 어떤 고급 아삼 홍차에 뒤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수십 년 만에 다시 립톤티의 매력에 중독되고 말았다. 어렸을 때 마셨던 바로 그 홍차의 향기였다. 한국에 갈 때 엄마에게 티백 100개가 든 파키스탄 립톤티를 한 상자 갖다 드렸더니, 엄마가 남대문에서 구한 립톤티를 찬장에서 꺼내 보여주셨다. 우리는 두 홍차를 동시에 준비해서 맛을 비교했다. 똑같은 립톤 옐로 레이블 홍차인데도 두 홍차는 완전히 다른 차였다. 엄마가 산 립톤티는 '유니레버 러시아'가 케냐산 홍차 잎으로 러시아에서 제조한 것을 '유니레버 코리아'가 수입해 파는 제품이었다. 파키스탄산 립톤티는 풍미가 깊은데, 러시아산은 밋밋하고 향이 덜해서 인도 아대륙에서는 도저히 팔리지 않을 상품이었다. 홍차 맛을 비교한 후 부모님께 파키스탄 립톤티로 밀크티를 만들어드렸다.

밀크티의 맛은 물과 우유의 비율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 비율은 1 대 1이 바람직하며, 최대한 양보해도 물이 4일 때 우유가 1이어야 한다. 우유의 비율이 커질수록 깊은 맛이 나기 때문에 물을 안 넣고 우유만으로 진하고 두텁게 끓이면 맛도 있을 뿐 아니라 출출할 때 마시면 한두 시간은 거뜬할 정도로 든든하다. 그다음 재료는 설탕이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차이에 흰 설탕만 쓰고 꿀 같은 건 넣지 않는다. 냄비에 찻잎을 넣고 끓일 때 설탕도 함께 미리 넣는데, 차 한 잔에 설탕 한 큰술 정도의 비율로 넣는다. 사실 설탕을 전혀 안 넣어도 우유의 유당 때문에 기본적으로 단맛이 은은하게 한 켜 깔리므로 설탕이 싫으면 생략해도 된다. 파키스탄 차이에 들어가는 마지막 재료는 향신료 카다멈이다. 인도 등 다른 지역에서는 계피나 생강, 팔각, 정향 등 다양한 향신료를 넣지만, 파키스탄에서는 카다멈만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회향씨를 넣기도 한다. 카다멈은 한 잔에 한 개, 회향씨는 한 잔에 한 꼬집 분량으로 넣으면 된다. 카다멈은 껍데기가 살짝 벌어지도록 눌러서 냄비에 넣으면 향기가 더 잘 우러난다.

실제로 조리하는 방법은 이렇다. 립톤 티백에 붙은 종이 쪼가리를 미리 잘라버린다. 냄비에 우유와 물, 티백, 카다멈, 설탕을 잔 수에 맞추어 넣는다. 끓이는 동안 수증기가 날아가므로 액체를 10~20퍼센트 정도 더 넉넉히 넣어야 나중에 차가 찻잔의 절반밖에 안 되는 유감스러운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우유는 끓이면 순식간에 넘치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고 지켜보다가 일단 한 번 끓으면 재빨리 약한 불로 줄여야 한다. 이걸 잘 저으면서 7~8분 정도 끓인 다음 티백을 건져내고 잔에 따라 마시면 된다. 진한 맛을 원하면 10분을 훌쩍 넘겨도 괜찮다. 향신료는 자연스럽게 냄비 바닥으로 가라앉으므로 잘 따르면 번거롭게 따로 체에 밭칠 필요도 없다. 회향씨는 살살 씹어 먹으면 향기롭고 몸에도 좋은 식재료여서 찻잔에 따라 들어와도 상관없다.

지금은 이렇게 남아시아인들이 세계 최대의 차 소비 집단이 됐지만, 19세기 이전에는 남아시아에서 차를 재배하지도, 일상적으로 마시지도 않았다. 자생하는 고유의 차나무가 있긴 했어도 지역 주민들이 때때로 약초로 썼을 뿐 지금처럼 널리 음용하지는 않았다. 그랬던 곳이 홍차의 메카로 변신한 계기는, 역시나 영국의 식민 정책 때문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최대의 차 수출국이던 중국의 차 무역 독점을 우회할 방법을 찾다가 19세기 초 아삼 지역에서 상업적인 차 경작을 개시했다. 차나무 경작에 관한 정확한 노하우가 부족한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바람에, 영국 식민지에서 생산된 초창기의 찻잎은 재배 역사가 길고 재배 기술이 정교한 중국산 차보다 질이 떨어졌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생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차 농장 주인들은 남아도는 저품질 홍차를 팔아줄 소비자층을 식민지 내에서 발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지인을 대상으로 펼친 이들의 적극적인 홍보가 이내 효과를 발휘했다. 점차 현지 수요가 늘어나고, 차를 끓여 파는 노점상도 곳곳에 생겨났다. 차에 우유와 설탕과 향신료를 넣어 오늘날의 마살라 차이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싸구려 찻잎의 떫고 거친 맛을 부드럽고 달콤하게 변신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홍차의 독특한 향미, 우유와 설탕에서 얻는 즉석 열량, 카페인이 주는 각성 효과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피지배자들은 밀크티에 제대로 중독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 넘게 세월이 흐르고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도 오래지만, 이들은 오늘도 식민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 꺼풀 드리워진 음료를 홀짝이며 고된 하루를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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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노시내(번역가)

연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지를 떠돌며 27년째 타국 생활 중이다. 《마이너 필링스》 《책임 정당》 《대표》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등의 책을 옮겼고 《작가 피정》 《스위스 방명록》 《빈을 소개합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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