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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내의 작가 피정] 마이너 필링스

노시내의 작가 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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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적 감정은 촉수를 세우고 주변과 사물을 관찰하게 만든다. 때로는 상점 간판 같은 것에도 분노가 인다. (2022.11.17)


피정(避靜),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번역가 노시내는 지난봄 취리히로 40일간의 피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소란합니다. 26년 동안 6개 도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 음식들, 언어들이 피정의 내밀한 시공간을 흔듭니다.

〈노시내의 작가 피정〉은 그 기억과 인연의 일기이자 그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삼아 번역해낸 글입니다.



ⓒ 노시내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는 이제까지 내가 번역한 책 중에서도 가슴속에서 가장 공명이 컸던 책이다. 감춰져 있던 고통에 이름이 생기면 고통의 실체가 드러난다.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그것을 해소하는 첫걸음이다.

2002년, 그러니까 20년 전, 당시 애인이었던 알베르토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취리히 근교에 있는 소도시 빈터투어를 찾았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같은 정류장으로 다가오던 새하얀 할머니가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던 모양인지 가방에서 주섬주섬 안경을 찾아 끼고 다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구경했다. 동물원 원숭이 취급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잘 걷지도 못하던 고령의 노인에게 따지고 들기도 그렇고 해서, 썩은 미소나 한번 지어 보이고 얼굴을 돌려버렸다. 당시만 해도 빈터투어에서 아시아 여자를 보는 일이 그만큼 신기하고 드문 일이었다는 얘기다.

그러고 나서 20년이 흐른 지금, 빈터투어는 외국인의 비율이 도시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다문화 도시로 변모했다. 아시아인이 신기해서 안경을 고쳐 쓰는 사람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최근 빈터투어는 아랍계 테러 분자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장소로도 알려져, 치안 당국이 신경 써서 주시하고 있다. 그 문제와는 별개로, 나는 다양성이 커진 지금의 빈터투어가 너무나 편안하다. 알베르토의 가족들이 요즘도 그곳에 살고 있어 스위스를 방문할 때마다 인사차 들른다. 그럴 때면, 시인 캐시 박 홍이 말한 '마이너 필링스'를 오래전 내 안에 촉발시켰던 빈터투어가 이제는 오히려 다른 장소가 자극하는 소수적 감정을 한풀 꺾어주며 나를 위로하는 곳이 됐구나 싶다. 20년 전 그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 빈터투어의 지인들이 다들 신기해하며 웃을 정도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소수적 감정은 촉수를 세우고 주변과 사물을 관찰하게 만든다. 때로는 상점 간판 같은 것에도 분노가 인다. 어제는 아시아 여성의 얼굴 반쪽이 일러스트로 들어간 유명 초밥 체인점 간판을 보았다. 왜 우리의 얼굴이 초밥집 마케팅 도구로 전락해야 하지? 왜 아시아 여성이 식욕을 돋울 거라고 생각하지? 우리가 초밥이냐? 인종주의, 성차별, 오리엔탈리즘을 용케도 한꺼번에 담아낸 멍청한 로고였다. 소수적 감정이 제대로 자극된 나는 집에 와서 그 체인점 대표 이메일에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그 내용을 요점만 발췌해 옮기면 이렇다.

스위스에 적을 둔 아시아 여성으로서, 귀사 로고와 관련해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이슈를 하나 제기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얼굴을 사용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어필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왜 우리의 얼굴이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해야 합니까? 혹시 아시아 여성을 초밥에 빗대는 겁니까? 귀사의 식당을 지나칠 때마다 불쾌합니다.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입니다. 아시아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이며, 사람들이 아시아 여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진부한 고정 관념,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영구화하는 일입니다.

귀사는 젊고 역동적인 기업입니다. 특정 인종이나 성별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는 상술이 아닌, 신선한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인종주의나 성차별 문제에 민감하고 세심한 방식으로 마케팅을 한다면 더 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고 번영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아시아 여성의 얼굴을 로고에서 부디 삭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메일을 전송했다. 일단 답신을 기다려보고 오지 않으면 다시 보낼 생각이다. 몇 달에 한 번씩 반복해서 보낼 의사도 있다. 스위스에 사는 친지들에게 지원 사격도 요청하려고 벼른다.



'소수적 감정'은 이렇게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있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는 이제까지 내가 번역한 책 중에서도 가슴속에서 가장 공명이 컸던 책이다.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인종 차별에 늘 노출되는데도 그건 네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라며 내 인식이 폄하당할 때 느끼는 혼란과 분노와 우울의 감정, 그것이 마이너 필링스다. 나는 어디에 살든 지금도 집을 나설 때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너희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 권리는 없다고 속으로 되뇌며 미리 갑옷을 걸친다. 그렇게 갑옷을 챙겨 입는 마음, 나는 왜 이렇게 전장에 나가는 느낌으로 외출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냉소하는 마음 또한 소수적 감정이다. 이 소수적 감정이 꼭 인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장애인 등 모든 소수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비록 한국에 살았어도 그 감정을 모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성장하고 교육받고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너희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 권리는 없다'라고 속으로 외쳤으니까. 그 외침은 앞으로도 어디서든 계속될 듯하다.

종종 소셜 미디어에서 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접한다. 그중에는 『마이너 필링스』를 읽은 사람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마이너 필링스』를 번역한 뒤로는 그들이 타임라인에서 조용히 또는 격렬히 뿜어내는 불쾌한 인종적 경험담을 볼 때마다 작성자 본인들은 그런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마이너 필링스'라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된다. 이제까지 명칭이 없던 감정에 명칭을 달아주었다는 점만으로도 캐시 박 홍은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 감정이 나 혼자만 느끼는 착각이나 허상이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선사한다. 감춰져 있던 고통에 이름이 생기면 고통의 실체가 드러난다.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그것을 해소하는 첫걸음이다.

서유럽에서 아시아인은 소수자이고 여전히 이국적인 존재로 여겨지지만, 그 대신 일본, 한국, 중국이 차례대로 이룬 상당한 경제 발전을 존중해서 아시아인을 열심히 일하는 똘똘한 인종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아시아 이민 1세는 미국에 정착한 아시아 이민자들과 비슷하게, 본인은 언어 장벽으로 고생하더라도, 자녀 교육에 크게 신경 써서 2세들은 대부분 성공적으로 현지에 동화해 중산층 이상으로 진입한다. 따라서 사적인 일상에서는 여전히 인종주의가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 이를테면 눈 찢는 동작처럼 생김새로 놀린다든지 하는 것 — 최소한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아시아 이민자 집단을 싸잡아서 멸시하는 일은 드문 편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 출신 이주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같은 러시아 대도시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건설, 광업, 운송, 제조 관련 단순 노무직을 비롯해 매장 정리원, 택배원이나 기타 배달원,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 미화원과 식당 청소, 주방 보조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싼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소련의 일원으로 러시아어가 제2의 공용어이기 때문에 언어 장벽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아시아 인종인 까닭에, 단순 노무직 종사자와 그보다 임금이 높은 사무직 종사자 간에 외견상 인종이 나뉘면서 아시아계를 하류 계급으로 인식하는 현상이 생겼다.

처음 러시아에 가서는 사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아시아 얼굴들이 무턱대고 반가웠다. 시간이 가면서 그들이 러시아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고, 그 이주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러시아 사회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복잡해졌다. 종종 마트나 식당에서 만나는 중앙아시아계 점원들은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중 좀 더 쾌활하고 외향적인 사람들, 특히 중년 여성들은 내게 어디서 왔는지, 혹시 중국인인지 묻기도 했다. 아시아계끼리 서로 돕는 경향도 있는지, 한번은 지하철에서 중앙아시아계 중년 여성 옆에 자리가 났는데,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그 여성이 나를 콕 집어서 이리 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감사하다는 뜻으로 살짝 목례하고 옆에 앉았는데 더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주 가던 식료품점에서 어느 날 포인트 적립 카드를 만들라고 권하면서 꽤 복잡했던 가입 절차를 무난히 마치도록 열심히 도와준 계산대 직원도 중앙아시아계 여성이었다. 중국인이냐고 묻기에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가입을 도와주어 고맙다고 하자, 너무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냉정하지도 않은 눈길로 나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자기 할 일을 했다.

러시아에서 인종 차별은 다민족 사회였던 소련 시절부터 공식적으로 터부시되었다.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결성된 소비에트 연방을 민족 분쟁 없이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크림 타타르인과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여러 힘없는 비슬라브계 소수 민족들이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남아 있는 비슬라브계 소수민족은 지금도 대부분 시골에서 저소득층으로 살고 있다. 이들의 취약한 처지는 엉뚱하게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또렷이 드러나게 되는데, 러시아가 의외로 우크라이나 점령을 빠른 시일 내에 완수하지 못하면서 러시아군 사상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 중이어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징병으로 병력을 신속하게 충당하기에 젊은 인구가 부족했다. 엘리트 계급의 자식들은 역시나 뇌물, 연줄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군대에 안 가고 빠져나갔다. 꼭 특권층에 국한된 얘기만도 아니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회피할 방법이 있는데 요령 없이 군대에 가면 바보 취급을 당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결국, 군대에 가는 사람들은 연줄도 없고 뇌물을 바칠 경제력도 없는 서민과 시골 농민, 그리고 소수민족 출신들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 아스트라한주의 인구 구성은 러시아인이 68퍼센트, 소수민족 카자흐족이 16퍼센트인데 2022년 3월 우크라이나에서 전사한 아스트라한주 출신 러시아 군인 7명 가운데 6명이 카자흐족, 1명이 러시아인이다. 시골 소수 민족 출신의 자식들이 총알받이로 죽어 나가면 도시 엘리트의 자식이 전사하는 것보다 언론의 주목도 덜 받고, 따라서 여론에 미치는 영향도 적다. 저소득층인 시골 소수 민족 청년들은 급료를 잘 주겠다고 유인해 계약서에 서명시키고 전장으로 보내기도 쉽다. 심지어 중앙아시아 이주 노동자들까지 구슬려서 전장에 내보낸다고 하니 러시아의 심각한 병사 부족 상황을 짐작할 수 있고, 러시아군 징집 현실의 인종주의적 측면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식이면 결국 병사들은 동기 부여가 안 되어 사기 저하가 올 수밖에 없다. 러시아군이 고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도 나는 징집되는 러시아 소수자들이 느낄 마이너 필링스를 생각한다. 소수 민족으로서 이렇게라도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을 증명하여, 버젓한 러시아인으로 인정받고 내가 속한 종족의 위상을 올리고 차별을 줄이겠다는 심리의 작동을 짐작해본다. 과연 그들의 희생에 그들이 바라는 보답이 뒤따를지는 의문이다. 지배 권력에 순응한다면 마이너 필링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이너 필링스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저 | 노시내 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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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노시내(번역가)

연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까운 이들은 공부 강박증이라고 놀리지만, 지금도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면 가슴이 뛰고 기분이 좋아진다.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압도당할 때는 아무거나 들고 읽기 시작하는 활자 중독자다. 유학을 떠난 이래, 햇수로 18년째 타국 생활 중이다. 미국에서 8년, 일본에서 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4년, 지금은 2년째 스위스 베른에 머물며 글을 짓거나 옮기고 있다. 『일본의 재구성』,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등의 책을 옮겼고, 『빈을 소개합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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