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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의 리걸 마인드] 위태로운 독서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1월호
그 중차대한 시험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산책길에 잠깐 들렀던 서점에서 내가 이 책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왜 책을 읽기 시작하고선 손에서 놓을 수 없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2022.11.03)
내 인생에서 가장 위태로운 독서는 변호사 시험을 앞두고 이뤄졌다. 변호사 시험은 5일에 걸쳐 진행되는, 수험자에게 극한의 체력이 요구되는 시험이다. 시험 시간표는 이렇게 구성된다. 1일 차 오전 공법 객관식(선택형), 오후 공법 주관식(사례형, 기록형), 2일 차 오전 형사법 객관식, 오후 주관식 시험을 치르고 하루 휴식 시간을 갖는다. 5일간의 시험 여정에서 하루의 휴지기를 갖는 것은,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쉼 없이 시험을 보면 정신과 육체의 힘이 모두 소진되기 때문이다. 둘째 날 저녁 즈음엔 문자 그대로 책을 펴고 '눈에 바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고는 4일 차엔 민사법을, 5일 차 마지막 날엔 오전에 민사법 사례형과 오후에 노동법·경제법 등 선택형 과목 시험을 끝으로 대장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시험 시간표에 따른 일반적인 공부 방법은 이렇다. 시험 순서의 반대 방향으로 해당 과목의 마지막 정리를 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시험 5~8일 전엔 민사법을, 3~4일 전엔 형사법을 공부하고 시험 직전 첫 시간 과목인 공법을 공부하며 시험장에 들어가는 식이다.
내가 그 위태로운 독서에 빠졌던 것은 마지막 민사법 정리를 앞둔, 시험 1주일 전 즈음이었다. 전북 전주에 있다가 시험 몇 주 전부터 서울에 미리 올라와 있던 나는 시험장인 중앙대학교 인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혼자 저녁을 먹곤 잠시 산책을 하다가 들렀던 대학교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잡고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함영준 작가의 『마흔이 내게 준 선물』.
그 중차대한 시험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산책길에 잠깐 들렀던 서점에서 내가 이 책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왜 책을 읽기 시작하고선 손에서 놓을 수 없었는지, 무언가에 홀린 채 계산을 하고 나와 책상 앞에 앉아 민사법을 공부하는 대신, 책을 그날 밤 한 번에 다 읽어버렸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마지막 민사법 공부의 시작을 앞두고 두려움이 밀려왔고(민사법은 변호사 시험에서 절반 정도의 배점을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목이고, 가장 어려운 과목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독서를 택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도 종종 저지르던 실수이기는 하다. 나는 그날 밤 늦도록 『마흔이 내게 준 선물』을 읽었고, 나머지 공부를 하듯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 당일 끝내야만 했던 상법 교과서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서재 한쪽에 여전히 꽂혀 있는 그 책. 지금도 책등을 볼 때마다 중앙대학교 시험장의 긴장과 불안, 상법 책을 허겁지겁 볼 때의 중압감과 함께, 차가운 시험장에 입장하며 내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한겨울 입김이 떠오른다.
다른 의미에서 나의 위태로운 독서는 얼마 전 골프 연습장에서 이뤄졌다. 서울에서 인기 있는 실외 골프 연습장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기 마련이어서, 연습장에 들러 타석을 예약하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절차를 치러야만 한다. 골프장 가벽에 붙은 양쪽 끝자리에서 멀고 중앙에 가까운 자리일수록 대기 시간이 더 길어지는데, 평일 저녁 기준으로 30분 정도 기다리는 것은 양호한 편이고, 경우에 따라 한 시간 반 정도까지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대기자들의 행동 양태는 통일되어 있다. 안내 데스크나 키오스크에서 타석을 예약하고는 예약자 대기실에서 TV를 보거나,(보통 골프 전문 채널이 화면에 나온다) 복도에 마련된 대기 좌석에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스마트폰을 보는 게 대부분이다.
어느 날 나는 골프백에 작은 소설집을 한 권 넣어 갔다.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나는 이 책을 실수로 두 권을 샀는데, 한 권은 책이 나오자마자 인터넷 서점에서 샀고, 한참이 지난 후에 어느 동네 서점에서 한 권을 더 샀다. 동네 서점 판본은 일반 판본과 다르게 책 표지를 더 예쁜 노란색으로 발간했는데, 아마도 중복 구매 실수는 겉표지가 다른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집에 같은 책을 둘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나중에 산 동네 서점 판본을 오렌지색 골프백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이번엔 키오스크에서 타석 예약을 하면서 평소와 달리 타협하지 않고 2층 한가운데 자리를 골랐다. 이미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짐짓 여유로운 척하며 골프 가방을 내려놓고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작품집을 꺼내어 읽었다.
실내 복도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소설집을 읽는 나는, 어쩌면 골프 스윙을 연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소설집을 읽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닐까. 지나가는 아마추어 골퍼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만, 나는 맹렬히 소설을 좇아간다. 밖에서는 정타를 치지 못하는 골퍼들의 둔탁한 타구 소리가 퍽퍽, 팡팡 불규칙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되자 마침내 나는 책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타석에 들어선다.
나에게 '독서란 이런 것이다'라는 원체험을 형성하게 해준 책으로 장정일 작가의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 읽었던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그의 독서량에 놀라고 글의 신랄함에 더욱 놀랐었다.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장정일이 책에서 당대의 한국 여류 소설가 두 명의 문장을 가차 없이 비판했던 것은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정치 평론에 강준만이 있다면, 여기 문학 판에는 장정일이 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나오고 몇 년 후에, 장정일은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음란물 제작 혐의를 받고 구속 기소된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이 된다. 도대체 음란물 제작 혐의라니! 그게 불과 이곳 한국의 20여 년 전 상황이었다니!
장정일 작가의 근작 시집 『눈 속의 구조대』와 소설 『구월의 이틀』을 갖고 있던 나는, 한영인 평론가와 함께 최근에 낸 서간집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발간 소식을 듣고는 바로 사 읽었다. 장정일의 인간적인 면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독서 가치는 충분하다.(그렇다고 『구월의 이틀』의 실망스러움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지만)
얼마 전 서울의 한 서점에서 열린 그들의 북 콘서트에도 참석했다. 사실 한영인 평론가는 대학 시절에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후배이기도 한데, 간혹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접하다가 북 콘서트 자리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영인은 더 멋있어져 있었고, 처음 본 장정일 선생은 생각보다 늙어 보여 안타까웠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청년 장정일이었기에 나의 감상은 정당하다.
한 시간 반 동안 한영인 평론가의 달변과 장정일 작가의 눌변(같은 달변)을 확인한 나는, 몇 년 만에 만난 영인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장정일 선생에게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곁눈으로 그를 흘끔거리며 서점을 황급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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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그만두는 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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