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릭의 창작 일기] 생일의 추억
슬릭의 창작 일기 7화
이 세상에서 또 일 년을 버텼구나 하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하루를 보내는 것만큼 또 다음 일 년을 버틸 힘을 낼 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2022.07.05)
7월에는 내 생일이 있다. 7월 4일. 미국의 독립 기념일과 날짜가 같다. 나는 미국에 살지는 않아 딱히 그 사실에 신경이 쓰이지는 않지만, 나 개인의 역사에 있어 7월 초 생일은 생각보다 애매하고 임팩트가 없다. 생일날 겪었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 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동네에 처음으로 맥도날드가 생겼다. 너무 신난 나머지 맥도날드를 빌려 생일 파티를 해야겠다고 엄마를 졸랐다. 그전까지는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 파티를 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초대장도 만들지 않았다. 그저 며칠 전부터 친구들에게 “나 맥도날드에서 생일 파티 하니까 많이 와줘.”라고 말하고 다니기만 했다. 파티를 여는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들떠 ‘생일날 맥도날드에 가면 내 친구들이 바글바글 와 있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결과는? 너무나 뻔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침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엄마와 함께 기다렸지만 정말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너무 속상해 울고 싶었지만, 창피한 마음이 더 커 엄마 앞에서는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시는 생일 파티 같은 거 하자고 하지 말아야지. 그냥 가족들끼리 촛불 켜고 케이크 먹고 해야지.
그렇지만 6학년이 되니 주변에서 어떻게 사람을 모으는지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생일 파티를 하니 나도 다시 하고 싶어졌다. 중요한 건 초대장.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일단 마흔 개의 종이 카드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학급의 모든 친구에게 전달해 줬다. 3학년 때의 아픈 기억 때문에 초대장을 전달하면서 심장이 콩콩 뛰었다. 받기만 하고 안 오면 어쩌지, 그때처럼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초대장을 받은 애들도 “축하해~” 한마디만 할 뿐 심드렁했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나고 예약해 둔 치킨집으로 향했는데, 이게 뭐람. 너무 많은 아이들이 찾아와 치킨집에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부터 학기 내내 말 한마디 섞지 않았던 아이까지 모두 와줬다. 물론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보다 공짜 치킨을 먹기 위해서가 더 큰 이유였겠지만 어찌 되었든 기뻤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치킨을 먹고 시간이 더 남는 아이들과 함께 밀크셰이크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초대장이었는지, 치킨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사정이 좀 바뀌었다. 어쩌다 보니 학구열이 남다른 학교에 입학했는데, 7월 초는 언제나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생일 파티 같은 걸 열 겨를도, 그런 여유로운 이벤트에 기꺼이 와줄 사람도 없었다. 나 역시 부랴부랴 공부를 하느라 파티를 열 정신이 없었다. 친한 아이들 몇몇만이 생일 축하한다고, 시험 잘 보라고 초콜릿이나 우유, 인기 많은 빵 같은 것을 책상에 두고 갔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또, 시험 기간에는 학교가 빨리 마치기 때문에, 마지막 시험 날과 생일이 겹치는 날에는 하루 종일 친구들과 시내에서 놀 수도 있었다. 2000년대에 경기도 구리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돌다리로 가 아트박스와 바른손을 구경하고, 유박사 채소곱창을 먹고, 캔모아로 가 파르페와 토스트를 잔뜩 먹은 뒤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소화시키고 스티커 사진을 나눠 가진 후에야 우리의 일과는 끝났다. 하나 서러웠던 것은,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어머니께서 미역국을 끓여 주시지는 않았다.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은 아니었지만, 시험 날 미역국을 먹으면 떨어진다는 속설을 신경 쓰신 것이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6년 내내 시험 날과 겹치는 생일을 맞이할 때면 심심한 설움을 느끼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미역국을 그리워했다.
열아홉 살 때의 일화도 하나 생각난다. 당시 내 짝이 전교 회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엄청난 악필인데도 학생회 서기가 되었다. 학생회는 소위 잘나가면서 공부도 잘하는 슈퍼 ‘인싸’들의 모임이었는데, 나는 공부는 잘했지만 인기가 많지 않았다. 소극적인 성격 탓에 친구도 많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회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다른 학생회 임원들의 생일날 화려하고 재밌는 생일 파티를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웠지만 내 생일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참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친구들도 내 성격을 파악했는지 생일날 조용히 복도로 불러내어 케이크만 전달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케이크가 어디야, 최소한의 이벤트로 제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날 아침에 받은 케이크를 교실 뒤쪽에 숨겨두었다가 하교할 때 꺼냈는데 이런, 상자 안쪽에서 날파리가 100마리쯤 나왔다. 여름의 더운 날씨를 이겨내지 못하고 케이크가 상한 것이다. 조용히 울며 한 조각도 맛보지 못한 케이크를 버렸다. 학생회 친구들에게는 고맙다고, 잘 먹었다고 문자를 보냈지만, 그 뒤로는 괜히 마음이 서러워 학생회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생일 파티가 점점 더 조촐해졌다. 연인이 있는 해에는 연인과 맛있는 것을 먹고 헤어지는 정도, 연인이 없던 해에는 가족들과 촛불을 불고 노래를 불렀다. 일 년에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라고는 해도 스무 해를 넘기니 다른 날과 똑같았다. ‘하긴 일 년에 두 번 있는 날도 있나?’라는 생각으로 무덤덤하게 보내며 남들도 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 생일날 미국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미국에 가서 산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뷔하고 특별한 생일 파티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즈음엔 애인도 없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기로 한 때라 정말 외로운 생일을 보낼 줄 알았다. 편의점에서 제일 비싼 술이나 사 마실 생각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있는데 별안간 당시 팬클럽(?) 회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생일인데 별일 없느냐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더니 식사나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기에 작업실로 초대했다. 그때는 작업실이라고 해봐야 정말 작은 원룸에 컴퓨터 한 대, 의자 한 개, 소파 베드가 전부였기에 피자를 시켜 바닥에서 먹었다. 조촐했지만 혼자 보내는 것보다 백배는 좋았다. 같이 맥주를 마시다가 취해서 밤새 이야기를 하고 비좁은 소파 베드를 공유했다.
다음 날 정오쯤, 해장을 하러 가자고 하기에 무작정 따라나섰다. 좀 이상했던 건, 나도 이사 온 지 일주일도 안 된 동네였고 회장님은 처음 오시는 동네일 텐데 구석구석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속으로 ‘도대체 어딜 가는 거지?’ 생각하며 따라갔지만, 식당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 지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서운 마음이 들어 회장님의 등을 붙잡고 “저, 여기 식당 아닌 것 같아요.” 하며 벽을 보니 회장님 이름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예약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지금 여길 들어가면 엄청난 민폐일 것 같아 얼른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했지만, 회장님은 막무가내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짜잔! 서른 명에 가까운 나의 팬들, 전 소속사 사장님이자 제일 친한 친구인 제리케이, 그의 파트너분 그리고 제리의 강아지까지 파티 룸에 있었다. 나를 위해 한 달을 넘게 준비한 생일 파티라고 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이렇게 완벽한 생일 파티라니, 인생에 다시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게임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못 오신 분들은 영상 편지로 함께해 주셨다. 선물도 잔뜩 받았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왜인지 모르게 '멜론빵맨'이었는데, 누군가 멜론빵맨 코스튬을 준비해 주셔서 하루 종일 초록색 인간으로 지내기도 했다. 헤어질 때에는 너무 고마워 한 분 한 분 포옹해 드렸다. 지금에서는 모두 각자 다른 길로 가고 있겠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그리워지는 얼굴들이다.
올해 생일에는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한다 해도 좋을 것 같다. 원해서 태어난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또 일 년을 버텼구나 하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하루를 보내는 것만큼 또 다음 일 년을 버틸 힘을 낼 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며 마주 보고 껄껄 웃어볼 예정이다. 령화야,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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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작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괄호가 많은 편지』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