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뮤지컬] 오롯플래닛 최인혜 대표, 누구나 동등한 관객이 될 수 있도록
공연 자막 서비스를 운영하는 오롯플래닛의 최인혜 대표를 만났습니다.
글 : 이솔희 사진 : 오롯플래닛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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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해 대학로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최인혜 대표는 어느 날 우연히 더뮤지컬의 기사 한 편을 본다. 청각장애인 배우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선보인 미국 데프 웨스트 시어터(Deaf West Theatre)에 관한 기사였다. 그 기사를 본 순간 최인혜 대표의 머릿속은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찬다. ‘내가 지금까지 혼자서 무엇을 누리고 있었던 거지?’ 자신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취미생활인 ‘공연’이 누군가에게는 쉽게 누릴 수 없는 경험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다짐한다. 언젠가는 누구나 장벽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누구나 동등한 관객이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그렇게 ‘유니스텝’의 씨앗이 심어졌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은 많은데, 정작 그들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온전하게 즐기지 못한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공연이 제 삶에 큰 원동력이 되어주는 존재인 만큼, 이렇게 좋은 콘텐츠를 더 많은 사람들이 동등하게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공연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대학도 사회복지 전공으로 진학했고요.”

 

최인혜 대표가 운영하는 오롯플래닛은 청각장애인의 문화 향유를 위해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하는 기업이다. 대학 창업 동아리에서 시작해 2020년 정식으로 창업했다. 그동안 영화,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를 중심으로 작업해 왔으나, 지난해 여름, 공연 전용 자막 서비스인 ‘유니스텝’을 새롭게 론칭하며 영역을 확장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자막은 물론, 외국인 관객을 위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자막을 제공한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랭보> <배니싱>, 연극 <프라이드>를 비롯해 약 10편의 작품에 서비스를 도입했다. 아직 공연계에서는 낯선 서비스인 만큼 첫발을 떼는 것은 물론 쉽지 않았다. 최인혜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바짓가랑이를 붙잡듯 간절한 심정”으로 공연 제작사에 쉼 없이 제안서를 보냈다. 

 


공연계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최인혜 대표에게 네오프로덕션의 <사의찬미>, 서울예술단의 <천 개의 파랑>, HJ컬쳐의 <더 픽션> 등 굵직한 작품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첫 작품이 <사의찬미>여서 그런지, <사의찬미> 첫 공연이 정말 기억에 남아요. 자막을 제작하고, 공연장에 휴대 기기를 설치하고, 현장에서 오퍼레이팅을 하고…. 모든 과정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정말 많이 긴장했는데 무사히 서비스가 제공됐고, 자막 서비스를 경험한 관객분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뿌듯했어요. 학생 시절 <사의찬미> 공연을 보기 위해 대학로에 왔던 제 모습이 떠올라서 뭉클하기도 했고요. 특히 <사의찬미>는 공연 중 일본어 대사가 등장하다 보니, 비장애인 관객분들도 자막 서비스를 통해 공연을 더욱 깊이 있게 즐길 수 있었다는 후기를 남겨주셔서 인상 깊었어요.” 

 

유니스텝 서비스는 자막 제작-티켓 판매-현장 진행,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 먼저, 전문 번역 업체를 통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한 대본을 오롯플래닛에서 자막으로 제작한다. 이때 사용되는 자막 제작 및 송출 프로그램도 오롯플래닛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현재 유니스텝 서비스는 일부 공연의 일부 회차, 그리고 객석 가장 뒤쪽 특정 구역에서만 제공되는데, 오롯플래닛은 제작사와 협의하여 자막 서비스가 제공되는 좌석의 티켓을 판매 대행한다. 이후 공연 당일 객석에 자막 송출용 휴대기기를 설치하면 공연 준비는 끝. 관객은 객석에 설치된 기기를 통해 직접 자신이 원하는 언어를 선택할 수 있고, 오퍼레이터의 조작에 따라 실시간으로 자막이 송출된다. 간헐적으로 자문 및 도움을 주는 일부 인원을 제외하면, 이 과정에서 실무자는 최인혜 대표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이기에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가장 시급한 것은 자막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는 주변 관객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두운 객석 내부에서 휴대기기를 사용하여 자막 서비스를 제공할 때 스크린의 빛이 주변으로 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니스텝 서비스가 객석 가장 뒤쪽 일부 좌석에만 제공되는 이유다. 자막 제작 및 송출 시스템을 규격화 하는 동시에, 공연마다 달라지는 배우의 즉흥적인 애드립을 자막에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도 필요하다.

 

“현실적인 여건상 현재는 객석 가장 뒷줄에서 서비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언젠가는 자막 서비스가 상용화 되어 관객분들이 공연 회차와 자리를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요. 물론 그런 날이 오려면 자막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다른 관객분들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순간이 많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가 언제까지나 그들의 선의에 기대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공연 관람 문화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거나, 스크린의 빛 번짐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등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자막이 내일의 문화를 만든다.’ 오롯플래닛의 모토다. 지금은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서비스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공연계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다. “객석에 설치해 둔 자막용 기기를 보시고, 자막 서비스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관객분들이 많아요. 저희는 이러한 호기심이 단순한 호기심에 머무르지 않고, 긍정적인 발전으로 이어지길 바라요. 요즘 OTT로 영화, 드라마를 볼 때 한글 자막을 사용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눈으로 대사를 확인하면, 내용 이해가 더 쉬우니까요. 공연을 볼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넘버 가사나 텍스트 양이 방대한 연극의 대사를 직접 눈으로 보며 공연을 관람하면 이해도가 훨씬 높아요. 관객분들 입장에서 공연 자막 서비스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공연이 주는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고, 그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는 서비스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오롯플래닛은 배리어프리가 당연한 세상을 꿈꾼다. 최인혜 대표는 ”유니스텝이라는 서비스가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웃음 지었다. 이러한 자막 서비스가 사라질 정도로 사회적 약자와의 공존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니스텝이 사라진다고 해도, 저희를 대체할 수 있는 더 좋은 서비스가 도입된다고 해도, 그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람차요. 떠날 때 떠나더라도, 공연 자막 제공 서비스의 기반을 제대로 닦은 뒤 떠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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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솔희

뮤지컬 전문 매체 <더뮤지컬> 기자. 좋아하는 건 무대 위의 작고 완벽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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