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소설가 김지연, 실컷 울고 나면 도움이 되는
『마음에 없는 소리』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때가 있잖아요. 제가 그리는 인물들에 대해 ‘다들 한번씩 크게 울게 해주고 싶다, 이렇게 힘든데 울게라도 해주자.’ 하는 기분으로 썼어요. (2022.04.26)
우리는 삶의 많은 순간들을 태연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내놓는 일도, 슬픈 일 앞에서 드러내놓고 펑펑 울어버리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 순간마다 많은 마음들이 층층이 쌓인 것일 수도 있겠다고, 김지연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으며 생각했다. 작가는 8편의 소설을 쓰며 인물들을 실컷 울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의 바람과 달리 인물들은 쉽게 울지 않지만, 복잡하고 섬세한 마음의 결은 소설의 장면마다 살아있다.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큐큐 퀴어 단편선에 실린 「사랑하는 일」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요. “이렇게 웃기고 발랄한 퀴어 소설이라니 좋다.”는 평이 많았죠.
혹시라도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고 이번 소설집을 보고 실망하실까 봐 걱정도 됐어요. 평소 스타일과 다르게 ‘웃기는 이야기를 써보자’ 하고 떠올린 소설이었거든요. 쓰는 내내 즐거웠어요.
『마음에 없는 소리』는 복잡한 마음들을 떠올리게 되는 소설집이었어요. 인물들은 태연한 표정을 짓지만 마음에는 많은 말을 담고 있고요.
제가 좀 그래요. 우유부단해서 어제는 이게 좋았다가 다음 날엔 다른 것이 좋을 때가 많거든요.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변한 건데,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아니 그때는 그렇게 말해놓고 왜 딴소리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좋아한다고 말해도 백프로는 아닐 수 있고, 살다 보면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변하는 마음에 대해서 써보고 싶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이 딱 저와 작가님 또래더라고요. ‘30대’라는 시기는 참 애매한 것 같아요.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한데, 그렇다고 사회가 기대하는 ‘청년’의 이미지에 딱 맞는 것도 아니죠.
정확히 말하면 저보다 조금 어린 친구들인데요. 제가 소설을 본격적으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무렵의 나이예요. 당시에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경력도 애매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았거나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그 친구들이라고 단단한 자리를 갖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제 눈에는 확신을 갖고 삶을 꾸려가는 것처럼 보였죠. 당시의 심란한 마음이 많이 반영된 것 같아요.
소설들을 끝까지 읽으면 어떤 장면들이 또렷이 남는데요.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쓰는지 궁금했어요.
구조를 철저히 정해놓는 작가님도 있겠지만, 저는 처음, 중간, 끝 정도만 느슨하게 떠올리고는 그 안의 장면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써요.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기는 하지만, 쓸 때는 즉흥적으로 쓰는 편이고 갑자기 떠올린 장면을 집어넣기도 해요.
소설의 화자들은 서울에 살다가 다시 고향을 찾아요.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울의 삶에 지쳐서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가죠.
질문에 답하다 보니 새삼 제 경험이 많이 녹아들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고향인 거제에 살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거든요. 그러다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가 소설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다시 올라왔어요. 저뿐만 아니라 주변에 타향살이를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만나면 서울 생활이 녹록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죠.
서울과 고향을 오간 경험이 반영된 것이었군요.
오히려 서울을 잘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른 작가님들이 서울을 배경으로 하면 자연스러운데, 제가 쓰면 어쩐지 서울에 처음 온 사람이 유명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이야기 같거든요. 그래서 그냥 잘 아는 장소를 쓰게 돼요. 고향을 배경으로 할 때 재미있기도 하고요.
「굴 드라이브」는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삼촌의 말을 듣고 ‘내’가 고향에 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고향은 한때 조선업으로 흥했지만 지금은 쇠락해가는 바닷가 마을이죠. ‘내’가 굴 양식장의 배달을 돕게 되면서, 학창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반장’을 다시 만나는데요. 처음 쓴 버전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고요.
초고에서는 반장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었어요. 옛 남자친구를 만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썼는데 전개가 뻔하다는 말을 들었죠. 그럼 반장과 ‘나’의 에피소드를 써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나’와 반장과의 관계가 재밌었어요. 반장이 고등학교 시절 ‘나’를 미워했던 일에 대해 두 번이나 사과하는데 ‘나’는 끝까지 용서해주지 않죠.
저도 마지막에는 용서할 줄 알았어요.(웃음) 그런데 가끔 제 의도와 달리 인물들의 대사가 나올 때가 있거든요. 이쯤 되면 용서해줘야지 했는데 “아니! 용서 못하겠는데.” 하는 대사가 나온 거예요. 그래, 그냥 용서를 안 하는 것으로 가자. 그렇게 마무리 지었죠.
대화 장면이 생생해요. 특히 말다툼하는 장면이 현실감 넘쳐서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용서 안 해줄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싫어해.” “미친. 진짜” 친구랑 싸울 때 진심으로 나오는 반응 같아요.
쓰다 보면 인물의 대사들이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그걸 받아서 쓰는 느낌이에요. 주변 친구들 말투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본인들은 잘 모를 거예요. 말다툼 장면은 제 속에 쌓여 있는 말을 쓴 것 같아요. 입 밖에 내지는 않아도, 저녁에 누워서 ‘이 말을 했어야 하는데…’ 하는 말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은 결말에서 묘한 감정이 밀려오는 소설이었어요. 나체로 바다에 뛰어들어보고 싶은 ‘내’가 여자친구 진영과 함께 남해안의 마을로 떠나죠. 그런데 결말에서 이 일들은 과거의 추억이 돼요. 현재인 듯 미래인 듯 여운을 남기는 방식이 좋았어요.
예전 여자친구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마지막에 넣고 싶었어요. 헤어진 사이니까 너무 좋았다고 쓰는 것도 이상하죠. 그래도 헤어졌다고 해서 좋았던 기억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좋았던 버전으로 써봤어요. 바닷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 해변의 이미지를 살리고 싶었고, 파도가 밀려오고 떠나가는 것처럼 리듬감이 있었으면 했죠. 쓰고 나니까 왠지 자신이 없어져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마지막 장면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 안심했어요.
소설을 덮은 후 “들러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들”(158쪽)의 이미지가 끝까지 남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의 모래처럼요.
과거에 일어난 일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면 결과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 잊은 것 같다가도, 선택을 내릴 때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 타인의 말이나 행동들이요. 그런 생각이 소설에 들어온 것 같아요.
「작정기」는 여행지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설이죠. “원래 다케오에 가려고 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원진이었다.”(99쪽)는 첫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돼요.
실제로 친구와 일본여행을 가기로 했다가 사정상 혼자 가게 된 적이 있어요. 「작정기」에 나온 장소들은 다 가본 곳이에요. 소설에 나오는 ‘녹나무’도 직접 봤고요. 원래 제가 여행을 안 가는 편이고, 딱히 소설로 연결되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다케오 여행이 처음으로 혼자 간 여행이었더라고요. 혼자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면서 소설이 된 게 아닐까 싶어요.
소설의 표면에 사연의 배경이나 들끓는 감정이 안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 원진이 왜 세상을 떠나는지, 주차장에 세워진 차가 왜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오는지 별로 해명하지 않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나 고민이 됐어요. 친구가 죽은 건 큰 사건인데 짧게 언급하기만 하고 넘어가니까요. 그런데 그 내력을 자세히 쓰는 게 이 소설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차가 왜 없어졌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유를 채워 넣는 것도 이상한 일 같아서 안 쓰는 걸 선택했죠.
작가의 말에서 “글쓰기란 엉엉 우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왕이면 온 힘을 다해 남김없이 잘 울고 싶다”(315쪽)고 쓰셨죠. 가장 먼저 쓴 소설인 「내가 울기 시작할 때」에서 인물들이 우는 장면을 찾아봤어요. 전부 남 앞에서 드러내놓고 우는 성격은 아니라서 뒤늦게야 우는데, 그럼에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더라고요.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때가 있잖아요. 제가 그리는 인물들에 대해 ‘다들 한번씩 크게 울게 해주고 싶다, 이렇게 힘든데 울게라도 해주자.’ 하는 기분으로 썼어요. 울어서 떨쳐버릴 수 있는 건 떨쳐버리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의 첫 소설인 「내가 울기 시작할 때」는 어쩐지 투명하게 하고 싶은 바가 드러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애착이 가는 소설이었습니다. ‘삼’과 ‘내’가 사는 현실에는 폭력과 배제가 있는데,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삶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221쪽)는 문장을 쓰실 때, 작가님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소설 속 두 사람이 암울한 커플이기는 하죠.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자살을 한 것이라고 보는 독자분들도 많았어요. ‘자살은 아니다’라고 썼지만, 분명한 이유를 밝히진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 사람들이 굉장히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생각하며 썼어요. ‘삼’은 이상한 취미를 가진 인물인데, 그 활동도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지속하는 방식이죠. ‘나’ 역시 잘하고 싶은 게 많고, 어떻게든 삶을 나아지게 하고 싶었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요.
소설을 쓰기 전에는 시도 쓰셨다고요.
대학교 때는 시를 많이 썼어요. 졸업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일 때문에 못 쓰는 시기도 있었죠.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대학원에 가면서였어요. 당시 나이도 많았고, 한동안 고향에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근데 그 때는 고향에 있는 게 너무 싫었나 봐요.(웃음) 집에 미리 알리지 않고 대학원 시험에 합격한 후에 ‘다시 서울 가겠습니다’ 하고 무작정 상경했거든요.
『사쿠테이키(작정기)』나 『마음의 진화』 등 소설에 인용된 책의 분야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좋아하시나요?
한때 정원 디자인이라던가 과학책 같은,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 걸 좋아했어요.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을 때, 수학 문제를 푼다고 하잖아요. 이 책들도 명쾌한 설명을 해주니까 속 시원한 기분이 들었어요. 오히려 과학적인 문장이 시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요.
책읽기 말고 다른 취미도 궁금했어요.
뜨개질을 좋아해요. 뜨개질이 봄, 여름, 가을에 열심히 떠서 겨울에 사용해야 하는 건데, 막상 겨울이 되어야 뜨개질을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떠놓고는 사용을 안 하죠. 그냥 그 과정이 즐거운 것 같아요. 게임도 좋아하는데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서 화자가 게임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소설에 조금 써먹기도 합니다.(웃음)
작가님의 첫 책은 스릴러 소설 『빨간 모자』였죠.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실 지 궁금해지는데요.
지금도 스릴러 같은 소설을 쓰고 있어요. 스릴러 장르를 일부러 찾아볼 정도로 좋아해요. 너무 무서운 걸 보면 잠을 못 잘 때도 있지만요.(웃음) 앞으로도 『마음에 없는 소리』의 세계관과 크게 다른 소설을 쓸 것 같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고향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지방도시에서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써보고 싶네요.
*김지연 2018년 단편소설 「작정기」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제12회, 제1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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