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파격적인 상상력을 만나고 싶다면
『보행 연습』 돌기민 저자 인터뷰
이원 젠더 체계에 들어맞는 몸(짓), 비장애 신체를 흉내 내는 그의 분투를 다룸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몸과 인정받지 못하는 몸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2022.03.23)
비일상적 상상력을 통해 몸을 둘러싼 규범과 경계를 교란하는 작품을 써온 소설가 돌기민의 『보행 연습』이 출간됐다. 2019년 텀블벅 펀딩을 통해 출간된 『아잘드』를 개고하여 정식출판한 이번 소설은 펀딩 당시 이미 눈 밝은 독자들 사이에서 강렬하고 매혹적이며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소설임을 인정받았다.
소설은 고향 행성의 침공으로 인해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무무의 목소리를 통해 전개된다. 15년 간 지구에 머무르며 무무가 터득한 생존법은 이렇다. ‘결함 없는’ 인간의 몸으로 변신하여 데이트 어플을 이용해 상대를 만나고, 성관계가 끝난 직후 상대를 잡아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것. 그러나 무무의 변신은 마법처럼 매끈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 형체에 욱여넣은 몸을 지탱하는 일은 너무 고통스럽고 어색해서, 두 다리로 걷는 일조차 연습이 필요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보행 연습』은 장제목 그대로 ‘56km’부터 ‘0km’에 이르기까지 인간 규범에 맞는 보행법을 연습하는 연습일지이며, 타인과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기록이자, 무무의 생존 일지, 그리고 다름에 대한 기록이다.
『보행 연습』으로 독자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독자분들께 선생님에 대한 소개와 이번 작품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돌기민입니다. 어떤 생물 혹은 사물이 더럽거나 추하거나 괴상한 존재로 여겨지는 사회적 맥락에 관심이 많습니다. 무엇이 종으로서의 인간을 사람답게 만드는지,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사는 삶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질문하길 좋아하고요. 『보행 연습』은 인간의 젠더 규범을 역이용해 데이팅 어플로 사냥감을 물색하는 괴팍하고 귀여운 외계 생명체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정식 출간 전에 해외 판권이 먼저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2018년 여름, 번역가 빅토리아 커들 님이 『보행 연습』의 독립출판 버전을 재밌게 읽어서 영어로 번역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영미권 출판사가 샘플 번역을 검토했지만, 별다른 소식은 없었어요. 그런데 번역가님의 소개로 바바라 제이 지트워(Barbara J Zitwer) 에이전시에서 제 작품을 좋게 봐주셨고 전속 계약을 체결하게 됐죠. 에이전시를 통해 하퍼콜린스(HarperCollins)의 임프린트인 하퍼비아(HarperVia) 출판사에 판권이 팔렸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식인 외계인 무무입니다. 어떻게 이런 설정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이 캐릭터를 통해 작가님이 의도하신 바도 궁금합니다.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영화 〈에일리언〉에 등장하는 괴물처럼 인간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먹는 생명체에 끌립니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 몸소 균열을 내는 것 같아서요. 인간 아닌 존재의 힘과 영민함, 특유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 느끼는 경외심이 있거든요. 무무는 제 취향의 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지구에 홀로 떨어진 무무가 사냥에 성공하려면 현실적인 조건과 방법을 고민해야 했고, 미헬 파버르의 장편소설 『언더 더 스킨』을 열렬히 참고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설리는 히치하이커를 차에 태워 은밀하게 마취한 뒤 인간 농장에 납품하는 외계 출신 노동자인데, 무무는 외로움을 해소하고 식량을 축적하려고 데이팅 어플에 의존하죠. (성적 매력을 지닌)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극심한 통증을 감수하며 이원 젠더 체계에 들어맞는 몸(짓), 비장애 신체를 흉내 내는 그의 분투를 다룸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몸과 인정받지 못하는 몸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표지도 작가님의 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표지 일러스트에 대한 설명 혹은 그림을 포함하여 관심이 있는 작업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인간 사냥을 마친 무무가 터덜터덜 숲속 우주선에 돌아와 타고난 몸을 회복하며 신체 개조로 쌓인 긴장과 피로를 씻어내는 모습을 상상해서 즉흥적으로 그렸습니다. 표지에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화에는 새싹처럼 돋아나는 뿔과 꿈틀거리는 다리가 있습니다. ‘보행 연습’이라는 제목과, 보행 연습이 필요치 않은 자유로운 상태를 형상화한 그림이 함께 놓인 아이러니가 마음에 듭니다.
소설의 진행 형식이 무척 독특합니다. 이 소설은 각 장이 km로 되어 있는데요,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장 제목인 56km, 37km, 21km, 14km 등은 데이팅 어플의 프로필에 표시되는 거리고, 무무의 사냥감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무무는 자기 정체(우주선의 위치)를 들킬 가능성이 낮으면서 체력이 허락하는 적당한 장소를 골라 움직여야 합니다. 한편 무무와 사냥감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설정으로 무무에게 닥칠 불행을 암시하고자 했습니다.
소설에서 애착 가는 장면이나 문장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왜 그 장면/문장/캐릭터 등을 좋아하시는지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겁니다. “인간을 증오하면서 증오심을 제쳐두고 그들을 빼닮으려는 몸부림을 이해하나요?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의 질서에 포섭되는 굴욕감을 번번이 압도합니다.” 무무가 인간의 규범과 맺는 관계는 일방적인 종속이나 억압으로 단순하게 요약될 수 없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무무는 규범의 횡포에 ‘기꺼이’ 무릎 꿇어 악착같이 목숨을 유지합니다. 규범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골고루 유발하지만 감쪽같은 보호색이 되어주기도 해요. 그는 이러한 규범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활용합니다.
앞으로 계획 혹은 준비 중인 작품 등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도 좋습니다.
글 쓰는 동력을 잃지 않도록 『보행 연습』 많이 사주세요. 리뷰도 목 빠지게 기다리겠습니다. 요즘은 몸에 깃든 분노와 수치심을 다룬 산문을 가끔 쓰며, 동물권에 관한 판타지 장편소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언제 완성할지는 모릅니다.
*돌기민 『보석사우나』, 『항문이 예쁜 사람』, 『뽀송이』, 『입던 팬티 팔아요...』, 『못생긴 사람들이 자꾸 태어난다』 등을 썼다. 더러운 것, 징그러운 것, 이상한 것에 끌린다. 수치심에 관심 많다. 『보행 연습』은 국내 출간 전 영미권에 판권이 수출되었으며, 2023년 HarperVia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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