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갭이어, 일과 삶을 재정비하는 시간
책읽아웃 - 이혜민의 요즘산책 (236회)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일의 트랙 위에서 내려와 각자만의 분투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2022.03.10)
“늘 여름날 같았던 일하는 마음에 겨울이 찾아왔다. 더 이상 예전처럼 일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지금 내가 가고 싶었던 방향으로 가고 있나? 쉬어야 할까? 쉬어도 될까? 쉬면 어떻게 먹고살지? 다시 일할 수 없게 되면 어쩌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나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무서웠다.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성장하고 성취하는 기쁨으로 살던 삶이 끝났을까 봐. 내가 사랑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웠던 모습을 영영 되찾지 못할까 봐. 잠시 멈추어 일의 안부를, 나의 안부를 묻기로 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방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 건강하게, 더 즐겁게 일하기 위해.”
여러분에게도 나의 온 열정을 바쳤던 어떤 일이 있나요? 너무나 그 일을 사랑하고 좋아한 나머지 나보다 일이 우선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짜릿한 성취감과 성장하는 기쁨을 위해서라면 여기에 내 몸과 마음을 마구 써도 좋다고, 나의 한계치를 넘어 달려본 적도 있으신가요?
그런데 어쩐 일이지 달려도 달려도 모자란 느낌이 들고 불안한 건 왜 일까요? 더 잘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고 나를 채찍질 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니 너무 지쳐버린 자신을 발견한 거죠. 내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일인데, 그 일이 나를 아프고 괴롭게 하는 경험. 머리로는 계속 앞을 향해 달려야만 할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뒤쳐질 것도 뻔히 알지만, 자꾸 몸과 마음은 그게 아니어서 의지를 잃고 방황해본 경험.
저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이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일'이 주인공인 이야기 말고, 일하는 ‘나', 일하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요. 저는 사실 요즘 좀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다 제가 벌인 일이긴 합니다만,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부쩍 입에 달고 산 말이 있었습니다. “나 이러다 번아웃 올 거 같아.”
아마 여러분도 자주 내뱉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요. 번아웃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말해요. 혹시 오프닝에서 들려드린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내 얘기 같다고 느끼셨다면 여러분은 이미 번아웃을 겪어 보셨거나, 지금 겪고 있거나, 혹은 곧 겪을 것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드는 상태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내가 정말 번아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은 과거에 번아웃을 겪었던 나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했을까요? 그게 항상 막막했는데, 오늘 소개할 책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에 담긴 이야기들이 여기에 아주 좋은 힌트가 될 것 같더라고요. 물론 이 책은 비단 번아웃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일과 삶에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람, 내가 해온 일들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사람, 세상의 속도에 떠밀려 숨 가쁘게 뛰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 커리어에 전환점이 필요한 사람, 일을 멈추고 쉬고 싶은데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될 만한 책이에요. 실제로 이런 상태를 건강하게 극복하기 위해서 일의 트랙 위에서 내려와 각자만의 분투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일의 트랙 위를 잠시 내려오는 이 시간, 우리는 이 시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이들에게는 방학이라는 게 있는데, 어른에게는 방학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그냥 좀 쉰다고 이야기하기엔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요.
이 책을 쓴 김진영 님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직장인들 역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커리어와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프리랜서도, 창업 준비의 시간도, 이직 준비의 시간도 아닌, 일과 삶에 대한 내 생각과 가치관에 집중하는 어떤 시간. 이러한 시간에 이름이 있다면, 이 시간을 누구든 좀 더 자유롭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진영님은 그 시간에 ‘갭이어'라는 이름을 붙여보자고 제안합니다. 원래 갭이어는 주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대학교 입학 혹은 취업을 앞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바로 학교를 가거나 직업을 갖기 전에 자원봉사나 배낭여행 등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나의 인생을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지 모색해보는 시간을 이야기하는데요. 일하는 우리에게도 이런 갭이어가 필요하지 않냐는 거죠.
이 책을 쓴 김진영 님도 번아웃을 겪었습니다. 다큐멘터리 PD로 일을 시작해서 여러 번의 퇴사와 이직을 거치며 영상과 텍스트 등을 아우르는 콘텐츠 기획자로 일을 해왔다고 해요. 꿈꾸었던 일이었고, 세상에서 일이 주는 자극과 보람과 성취가 가장 좋았다고 합니다. 이직 면접에서 “번아웃이 오면 어떤 식으로 해소하나요?” 같은 질문을 받고도 "저는 한 번도 번아웃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 일을 너무 좋아해서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는 게 제 장점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던 저자는 일을 한지 10년차에 번아웃을 직격탄으로 맞게 됩니다. 예전만큼 동료들과의 회의가 신나지 않았고, 새로운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 설레지도 않게 됐다고 해요. 한 번은 중요한 미팅을 가기 위해서 이동하던 택시 안에서 불현듯 시작된 울음이 멈추지 않아 결국 차를 돌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죠.
진영 님은 달리던 트랙에서 내려오기로 결정합니다. 완주도 휴식도 아닌 중도 이탈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고, 이대로 커리어가 끝나게 될까 봐 두려웠지만 트랙 위를 내려와 자신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거죠. 그 시간 동안 진영 님은 심리상담을 받기도 하고, 자신처럼 혹은 자신과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갭이어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누군가가 봤을 때 무의미해보일 수도 있고, 멈춰서 있는 시간처럼 보일 수 있는 ‘갭이어’의 기간을 가져본 적 있는 사람들과 나눈 인터뷰가 담겨있습니다. 책에는 일곱 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지만, 이 책을 쓰면서 진영 님은 수십 명의 갭이어를 들여다보고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진영 님도 그 시간을 함께 통과하면서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질문들에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간 과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질문은 이런 것들이에요.
1. 생산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까?
2. 꼭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달려야 하는 걸까?
3. 일과 삶이 분리될 수 있을까?
4. 나는 지금 내가 가고 싶었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5. 나는 어떤 환경에서 잘 자라는가?
6. 일을 잘한다는 건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돌아봤더니 저에게도 갭이어가 있었더라고요. 요즘산책 첫 편에서도 소개해 드렸듯이 2016년에 저는 퇴사를 하고 제 짝꿍과 함께 결혼식 대신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는 ‘결혼행진' 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저희는 각자 다른 회사에서 기획자와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좋아서 선택한 일이었지만 한 달에 하루이틀 밖에 쉬지 못하고 밤 12시가 넘어 퇴근하는 게 일상이다 보니 점점 지쳐갔어요. 당시에는 그게 업계의 당연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불평의 목소리도 쉽게 내기 힘들었고, 이제 막 3~4년차가 된 경력에 서른을 앞두고 퇴사를 결정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함께 결혼행진을 준비하면서 우리 삶에 조금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이번 한 번쯤은 아무 것도 정해놓지 않은 미래를 스스로에게 주고 싶었죠.
결과적으로는 그때 그렇게 트랙에서 내려와 본 게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그렇듯 저도 그 전까지는 휩쓸린 듯 살아왔는데, 퇴사를 하고 떠난 그 결혼여행을 계기로 처음으로 스스로 멈춰 서서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거든요. 또 방향만 맞는다면 내 속도대로 걸어도 언젠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체득한 시간이기도 했고요. 그때 얻은 자기 확신의 경험이 제가 다른 일을 할 때도 여전히 엄청난 힘이 되어줘요.
저와 남편은 그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몇 개월 간 바로 취업을 하지 않고 백수로 지내며 그 여행기를 책으로 썼는데요. 그게 저의 첫 책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행진』입니다. 독립출판으로 제가 쓰고 남편이 디자인을 했던 첫 책이라 지금 보면 참 어설펐지만,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요청도 없이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내 작업물을 만든 첫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 경험 덕분에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 내 속도가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저에겐 그 시간이 어쩌면 진영 님이 이야기하는 일과 삶의 영점 조절을 위한 첫 번째 갭이어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책에는 일의 트랙에서 내려와 갭이어를 선택한 사람들의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으니 꼭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나의 일과 삶의 건강을 돌아보는 데 꼭 필요한 질문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도 제가 인터뷰어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수없이 했던 질문들인데, 정작 제 자신은 그 질문들에 나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오늘부터 그 질문들에 답을 하나하나 적어볼까 합니다. 언젠가 다시 내 일의 방향과 속도를 재조정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 그 답들이 아주 든든한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속도를 다시 줄여야 할 때가 오면, 불안해하지 않고 이렇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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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인터뷰 채널 '요즘 것들의 사생활'을 운영하며 『요즘 것들의 사생활 : 먹고사니즘』 등을 썼다. 나다운 삶의 선택지를 탐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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