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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K열 19번] 당신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은 무엇입니까? - <피그>
마이클 사노스키의 <피그>
영화는 “진짜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한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주제일 지도 모른다. (2022.03.03)
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처음 10분. 모든 것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의 잔잔한 표면, 울창한 숲 사이로 하얗고 노랗게 떨어지는 햇살, 직접 흙을 맛보며 땅 속에 숨어 있는 버섯의 지도를 그리는 남자와 네 발로 통통 거리며 뛰어다니는 트러플 돼지의 킁킁 거리는 소리. 시골식 버섯 타르트를 만들기 위해 정성들여 밀가루 반죽을 만드는 남자의 큰 손과 트러플 돼지의 윤기 나는 털 위로 날리는 하얀 밀가루. 이 모든 것을 평화롭게 잡아내는 카메라와 사운드.
마이클 사노스키의 <피그>는 최상품의 트러플을 캐면서 사랑하는 돼지와 단 둘이 산속에서 살아가는 롭(니콜라스 케이지)의 일상을 묘사한 순간들과 함께 조용히 시작된다. 은둔자 롭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오직 일주일에 한 번, 자신의 존재감을 부풀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컬 푸드 바이어 아미르(알렉스 울프)가 화려한 스포츠카를 몰고서 트러플을 구매하러 올 때뿐이다. 그러나 롭의 평화는 이내 깨진다. 한밤중에 오두막에 침입한 괴한들이 롭의 머리를 가격하고 돼지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린 롭은 잃어버린 돼지를 찾기 위해 움직인다. 유일하게 말을 섞는 사람인 아미르와 함께.
그렇게 롭은 15년 전에 떠나온 도시 포틀랜드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비밀에 쌓여있던 그의 정체도 드러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로빈 펠드. 포틀랜드 요식업계에서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전설의 요리사다. 그는 자신의 트러플 돼지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들을 한 명 씩 만나면서 15년 전의 시간을 현재로 끌어당긴다.
영화는 “진짜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한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주제일 지도 모른다. 영화야말로 가짜를 세워놓고, 이것이 진짜라고 믿도록 만드는 허구적인 ‘리얼리즘’의 세계 아닌가. 영화 내적으로 설득력만 갖는다면 우리는 번개를 맞아 작동하는 타임머신 자동차도 믿고, 영혼에 무게가 있다는 말도 믿고, 천 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 도 믿는다. 정해진 약속 하에 기꺼이 거짓을 믿어버리는 세계. 그게 어쩌면 ‘영화적인 것the cinematic’의 요체다. 그런 주제에 <피그>는 용감하게도 ‘당신의 진짜’와 만나보라고 관객에게 권한다.
트러플 돼지를 찾기 위해 찾아간 힙플레이스 ‘핀웨이 레스토랑’의 핀웨이 셰프(데이비드 넬)와의 대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를 맛 본 롭은 셰프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테이블에 다가온 핀웨이는 곧 자신을 부른 이가 누구인지 알아본다. 젊은 시절, 보조 요리사로 함께 일했던 위대한 요리사 로빈 펠드...! 롭이 핀웨이에게 “누가 내 돼지를 훔쳐갔는지 알려 달라”고 말하자 핀웨이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저는 누구보다 당신을 존경해요. 하지만 이번 겨울 시즌에 내놓을 신메뉴에는 최상의 트러플이 필요해요. 아시잖아요. 평론가들, 투자자들, 고객들... 다들 기대가 커요. 이번 신메뉴 콘셉트는 로컬 식재료를 해체한 뒤 재구성해서...”
핀웨이의 허튼소리들을 듣고 있던 롭은 천천히 묻는다. “그런 걸 요리하는 건 즐겁나?” 핀웨이는 또다시 동문서답 한다. “모두들 좋아하니까요, 흥분되죠.” 이어서 다시 롭의 질문. “자네가 원래 운영하고 싶어 했던 건 영국식 펍 아니었나?” 핀웨이의 동공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건 진짜가 아니야. 알고 있지 않나? 비평가도 진짜가 아니고, 고객도 진짜가 아니야. 자네가 요리해 놓은 이게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지. 아무도 자네를 몰라, 왜냐면 자네가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자네는 조금씩 사라지지. 그들 기미에 맞춰 살지만, 아무도 자네를 제대로 보지 않아.” 이 말에 핀웨이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그리고 트러플 돼지를 훔쳐간 이가 누구인지 고백한다.
이 장면에서 크게 요동친 건 핀웨이만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기 전에 남이 원하는 것에 먼저 반응하고, 내 기준을 가지기 보다는 남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 익숙한 채로 지쳐버린, 스크린 밖의 나 역시 흔들렸다. 영화는 그렇게 포틀랜드 곳곳에 허상의 도상들을 심어놓고 ‘자신만의 진짜’를 만지고, 느끼고, 살아내는 롭과 대비시킨다.
트러플 돼지를 훔쳐간 사람의 생각과 달리, 최상품 트러플을 찾는 건 롭의 돼지가 아니라 롭 본인이었다. 그는 트러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돼지를 찾아 헤맨다. 롭의 진짜, 롭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은 오렌지 빛 작은 돼지였던 것이다. 돼지는 사랑하는 이가 떠나간 자리에 새롭게 둥지를 튼 또 하나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롭은 결국 돼지를 되찾지 못한다. 도둑질 당할 때 너무 험하게 다루어진 돼지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롭은 생각한다. “내가 그 아이를 찾으려고 나서지만 않았다면, 그 아이는 내 머릿속에서는 살아 있을 텐데.” 그 이야기를 들은 아미르는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죠.” 롭은 선선히 받아들인다. “그래, 실제로는 아니지.” 당신의 진짜를 찾으라고 권하던 영화는 이제 진실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지라고 한다. 진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니까. 영화관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용기를,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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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