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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K열 19번] 악녀의 재해석 - 리들리 스콧의 <하우스 오브 구찌>

#미투 이후의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라스트 듀얼> 이후에 온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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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상관없다. 가가의 얼굴 하나로도 158분을 즐기기엔 충분하니까. 극장을 찾아 가가의 작은 체구를 타고 흘러 스크린까지 뚫고 나올 듯 한 에너지를 충분히 즐기실 수 있기를 바란다. (2022.01.20)



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리들리 스콧이 또 영화를 내놓았다. 14세기 프랑스에서 벌어진 실화를 모티프로 했던 <라스트 듀얼>을 선보인지 얼마 안 되어서 그에 못지않게 뜨겁고 밀도 높은 영화를 들고 스크린을 두드린 것이다. <하우스 오브 구찌>, 이번에는 20세기 이탈리아다. <하우스 오브 구찌>를 보기 전에 <라스트 듀얼>을 먼저 만나보자. 함께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미투 이후의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영화

<라스트 듀얼>은 #미투 이후의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한 편이다. 영화는 중세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장 드 카르주(맷 데이먼)와 자크 르그리(아담 드라이버) 간의 결투 재판을 따라간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신의 뜻을 묻고자 했던 건 “자크가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를 강간했는가”다. 

영화는 세 개의 막(幕)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르그리트의 남편 ‘장이 말하는 진실’, 가해자로 지목된 ‘자크가 말하는 진실’, 그리고 피해를 호소하는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 순서대로 펼쳐진다. 1막에서 남편 장은 아내의 고통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자신의 명예만을 생각한다. 2막에서 자크는 “여자의 거절은 예스(no means yes)”라며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주장한다. 마르그리트의 관점을 따라가는 3막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물고’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폭행에 대한 마르그리트의 저항이 어떻게 묵살되었는가 폭로한다.

관점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듯했던 영화는, 모호하고 평화로운 중립지대에서 머물지 않고 진실인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목한다. 리들리 스콧은 3막을 시작하는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자막에서 ‘마르그리트가 말하는’을 페이드아웃으로 지우고 ‘진실(truth)’만을 남긴다. 영화는 아무도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마르그리트의 말이 진실임을 강조한다. 그렇게 마르그리트는 ‘피해호소인’이 아닌 ‘피해자’임이 드러나고, 자크는 ‘가해자로 지목된 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강간씬을 찍을 때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현장에 함께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신체적 접촉이나 노출 등의 장면을 촬영할 때 촬영 환경이나 배우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는 스태프로, 촬영 시 생길 수 있는 배우의 불쾌함이나 위법적인 상황을 방지하는 일을 한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기용이 활성화된 건 #미투 이후 할리우드의 중요한 변화였다. <라스트 듀얼> 제작진은 #미투의 철학을 영화로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실천했다.

물론 리들리 스콧이라고 처음부터 대단한 페미니스트 감독이었던 건 아니다. 스콧의 대표적인 여성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의 시나리오 작가 칼리 쿠리는 그가 영화의 페미니스트 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성토하기도 했다. 실제로 스콧은 맥락도 없이 지나 데이비스에게 상의를 탈의하는 장면을 찍자고 제안했고, 두 주연 배우인 데이비스와 서랜던이 이에 항의하면서 없는 일이 되었다. <에일리언>(1979)이나 <지.아이.제인>(1997)처럼 파워풀한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던 영화들에서도 오직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들어간 의미 없는 노출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스콧은 영화사에 남을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고 그려왔지만, 할리우드의 성차별적 관행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던 셈이다.



악녀의 재해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갇혀 있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스콧은 그 시대의 대중이 용인하는 최대치의 여성상을 그려왔다. 그런 시간이 쌓여 무엇을 의도하고 어떻게 그려야 할지 이해하는 감독으로서 <라스트 듀얼>을 내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인 <하우스 오브 구찌>도 여성 캐릭터 해석이 흥미롭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바로 그 구찌 가문에서 일어난 실화를 그리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이 시기는 구찌의 창립자 구치오 구찌의 두 아들 알도와 로돌프가 경영권을 나눠가진 후 “죽여서라도 갖고 싶은 이름, 구찌”를 둘러싸고 암투와 욕망의 드라마가 펼쳐지던 때다. 영화는 로돌프(제레미 아이언스)의 아들인 마우리찌오(아담 드라이버)와 결혼하면서 구찌 가문의 며느리가 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가 이 암투의 한 가운데에서 적극적인 플레이어로 나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스콧은 사라 게이 포든의 동명의 르포를 읽자마자 영화화를 꿈꿨다. 그 꿈을 20년 만에 이룬 셈이다. 구찌 가의 사연이 이토록 드라마틱해지는 건, 마우리찌오에게 배신당한 파트리치아가 그를 청부살인해 버렸기 때문이다. ‘현대판 신데렐라’로 불렸던 파트리치아는 곧 ‘희대의 악녀’가 되었고 18년을 감옥에서 복역했다. 대중에게 전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었던 그는 스콧과 레이디 가가를 만나면서 다면적인 얼굴을 갖게 되었다. 명민하지만 사랑에 모든 걸 거는, 순수하지만 동시에 욕망으로 부글부글 끓는, 계산에 능하지만 때로는 기꺼이 무모해지는, 복잡한 인간. 가가의 파트리치아가 너무 강렬해서 상대적으로 드라이버의 마우리찌오는 심심해 보인다. 그래도 상관없다. 가가의 얼굴 하나로도 158분을 즐기기엔 충분하니까. 극장을 찾아 가가의 작은 체구를 타고 흘러 스크린까지 뚫고 나올 듯 한 에너지를 충분히 즐기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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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문화평론가,『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문화평론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프로젝트38 연구원.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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