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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인’ 창문을 찾아라
곽아람, 공부의 위로 2화
그 수업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획기적인 창문이었다. (2022.01.20)
샤프한 인상의 젊은 교수가 칠판에 백묵으로 ‘劃期’라고 썼다. 강의실을 둘러보더니 “어떻게 읽는지 아는 사람?” 하고 물었다. 스무 명의 신입생들이 침묵에 빠졌다. 통영 출신의 한 남학생이 “뒤의 글자는 ‘기’입니다”라고 말했다. “앞의 글자는?” 교수가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못했다. “‘그림 화(畵)’ 자 같다.”고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교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주눅이 든 우리들에게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앞의 글자는 ‘획을 긋다’라고 할 때의 ‘획’이에요. 이 단어는 ‘획기’라고 읽습니다. 흔히들 ‘획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획기적’이라는 말은 앞 시대와 획을 그어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다른 시기가 왔다는 말이에요.” 수업의 이름은 ‘미술사입문’. 1999년 4월이었다.
1999년은 나에게 그야말로 획기적인 해였다. 그 전의 인생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 해. 재수 끝에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고향 진주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다. 또렷해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표면적이다.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하자면,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입시를 위해 단편적인 지식을 암기하던 시대를 마무리하고 지성(知性)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고고미술사학과 신입생들을 위한 전공필수 과목인 미술사 입문 강의는 학문을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은 신입생의 지적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하기에 제격이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어려운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술(art)’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으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교수는 ‘미술(美術)’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를 줄기차게 물었다. 세 번째 수업이던 3월 23일의 노트 필기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아름다운 것의 창조이거나 표현, 특히 시각적 형태; 이러한 표현에 있어서의 정교한 기술이나 태도.”
미술은 ‘시각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구분된다고 그 시절의 나는 배웠다. 그 가르침을 듣는 순간 눈앞의 안개가 걷히고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art’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예술’에서 ‘미술’을 떼어낼 수 있는지 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시각적 형태에 중점을 둔 미술에 대한 정의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전통적이라 할 수 있다.
개념미술의 득세가 지속되면서 사운드아트까지 미술관에 들어오게 되었고, 심지어 캐나다 설치미술가 재닛 카디프의 「40성부(聲部)의 모테트」는 전시장에 스피커만 수십 대 놓고 영국 튜더 시대의 성가(聖歌)를 틀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술의 핵심 요소는 시각이라 생각한다.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적인 미술 장르는 아직도 굳건한데 이들은 결국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과제가 많은 수업이었다. 첫 과제는 “미술과 나”라는 주제로 A4용지 두 장 분량의 짤막한 글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미술관도 갤러리도 없는 지방 소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게 그때까지 미술이란 책에서 본 것이 거의 전부였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책으로 배웠다.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그랜드 컬렉션 오브 월드 아트’라는 여덟 권짜리 화집이 집에 있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아버지가 할부로 사온 책이었는데, 부모님은 딱히 관심이 없었다. 거실 한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그 책을 오직 나만 읽었다.
나는 그림이 좋았다. 그림 자체도 좋았지만 그림이 발산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수십 번 반복해 책을 읽다 보니 신기하게도 양식(style)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보는 그림인데도 ‘어, 이건 라파엘로 거네’, ‘이건 반 고흐잖아’ 알게 되었다. 「미술과 나」라는 글에 그런 이야기를 썼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학기가 끝나기 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간송미술관과 환기 미술관을 다녀와 소감문을 작성해 내라는 과제도 기억난다. 봄 전시 첫날인 5월 16일 처음 간송미술관을 찾아 「금강산 진경전」을 보았다. 교과서에서만 본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금강전도」까지 나온 화려한 전시였지만, 간송미술관이 처음인 대학 신입생에겐 어려운 전시였다. 소감문에 이렇게 적었다.
어려웠다. 한국화는,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양화보다 오히려 어렵다. 필법과 준법, 원근법 등을 정확히 알지 못한 때문인지 그 그림이 그 그림 같을 뿐이다. 무지한 탓으로 별다른 감흥을 느끼자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더 보아봤자 머리만 아플 것 같아 포기하고 전시실을 나왔다.
대학 1학년 때의 이 소감문을 다시 읽으며 너무나도 솔직한 무지의 고백에 실소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류시화 시집 제목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나는 무서운 속도로 대학을, 새로운 것들을 빨아들였다.
르네상스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회화론』에서 그림을 프레임을 가진 일종의 ‘창문’으로 보았다. 그림은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원근법 등을 설명했다. 그는 특정 주제만 특별히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istoria’라 불렀다.
대학노트 열한 장을 앞뒤로 꽉 채우고 네 줄을 더 적어 기록한 그 수업에서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미술사의 아버지’ 빙켈만도, 도상학의 대가 파노프스키도 아니다. ‘획기’의 뜻과 알베르티의 ‘창문 이론’이다. ‘획기’를 알게 된 4월 6일에 이 이론에 대해서도 들었다고 나는 수업 노트에 기록했다. 이론의 복잡성과 상관 없이 당시 나는 창(窓)이란 말이 무척 아름답다 여겼다. 그림은 내게 항상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주었으니까.
자신의 창으로 본 세계를 재현하는 화가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나는 철저한 관람객으로서 그림이라는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가가 제시한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나만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았다. 활자로 이루어져 있는 책이라는 또 다른 창과 달리 색채와 선, 형태로 이루어진 보다 명료하고 더 다채로운 세계. 그렇지만 책과 마찬가지로 상상력의 여지가 충분한 세계. 지금도 그림을 볼 때면 항상 창문을 생각한다. 활짝 열린 커다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섬세한 레이스 커튼이 나부끼는 풍경이 연상된다. 그렇게 그 수업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획기적인 창문이었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획기’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한다. 그 단어를 떠올리면 커다란 흰 캔버스의 가운데에 굵고 검은 줄이 단호하게 그어져 있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줄 위의 세계와 줄 아래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마치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세계와 입학한 후의 세계처럼……. 인생의 한 챕터를 마치고 다른 챕터로 넘어갈 때마다 생각한다. ‘이건 획기적인 일이잖아.’ 새로운 세계와 묵은 세계 사이에 굵고 확실한 선을 긋고, 후회 없이 나아가리라 마음먹는다.
나는 책장을 뒤져 수업 참고 교재였던 오래된 책들을 살펴본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와 로리 슈나이더 애덤스의 『미술사 방법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나온 여덟 권 짜리 『서양미술사 강좌』, 실반 바넷의 『미술품의 분석과 서술의 기초』, W.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의 기본 개념사』……. 어떤 책등을 쓰다듬으면 마음이 아프다. 그 시절 지식에 대한 나의 기갈(飢渴)이 느껴져서다.
수업 참고문헌이 정해지면 그 누구보다도 빨리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지방 출신 유학생들은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주머니 사정은 항상 빠듯했고 책을 선점해야 사지 않고 과제를 작성하고 시험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취직해서 돈을 벌게 되었을 때 서점으로 달려가 오래 굶은 사람이 허기를 채우듯 빌려 읽을 수밖에 없었던, 끝내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그 책들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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