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특집] 나의 일기장(들), 그리고 볼드모트의 호크룩스 - 문보영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월호
제가 이렇게 많은 일기장을 쓰는 이유는 언제든 일기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이 나 일기장이 다 타버려도, 다른 일기장들은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2022.01.13)
새로운 전화 영어 선생님 포치와 ‘61 Stuck in Britain’s Highest Pub After Storm’이라는 제목의 데일리 뉴스를 읽었다.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영국의 한 술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꼼짝없이 갇혔다는 뉴스였다. 그곳에 있던 60여 명의 사람들은 요크셔 데일즈의 한 술집에서 사흘을 보내게 되었다. 눈은 3m 이상 쌓여서 나갈 수 없었고 전력은 차단되었으며 도로는 막힌 상태였다. 매니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영화를 틀어주었고 사람들은 모여 게임을 했고 노래도 불렀다. 그들은 대가족이 된 것처럼 사흘을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포치는 흐뭇한 미소를 보내며,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문보영 : 만일 상황이 악화되어서 더 오래 갇히게 되면 역할을 분담해야겠죠? 누군가는 요리를, 누군가는 청소를, 강아지 밥 주기를, 빨래를, 불 피우기를 담당해야 할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 일기 담당도 필요하지 않을까… 슬쩍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포치 : 일기 담당? 너 좀 웃긴 놈이구나?
문보영 : 나는 노래를 잘 못해요. 그래서 노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없을 거예요. 말을 잘하지도 못하고, 남을 웃게 하는 재능도 없죠. 요리도 못하고, 청소도 젬병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을 관찰하고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는 있어요. 대표로 일기(representative diary)를 쓰는 거죠. 아, 제가 집안일을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절대! 맞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쓴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일기란 우리의 영혼을 보관하는 일종의… 유리병 같은 거니까. 선생님은 어떨 것 같아요?
포치 : 나는 여행자처럼 즐길 거야. 근데 너 글쓰기가 취미인가 보지?
문보영 : 아니요. 그냥 일기를 쓰는 정도예요.
포치 : 그래? 나도 일기 쓰는 거 좋아해. 난 아주 오래전에 에세이스트가 될 뻔했어.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나이지리아로 이민을 가게 되었거든? 그곳에서 외국어로 일기를 쓰곤 했어. 말하는 건 모국어가 편했는데 쓰기는 프랑스어가 편했거든. 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어. 여하튼 프랑스어로 쓴 일기가 어떤 상의 후보에 올랐어. 난 그 글을 어디에 낸 적도 없는데 말이야. 학교 과제로 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몰래 보낸 모양이야. 그런데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 글은 심사에서 제외되었어. 난 나이지리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내가 그 상을 받아서 작가를 꿈꾸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해.
문보영 : 선생님 멋진데요?
포치 : 모국어로 쓴 일기보다 서툰 외국어로 쓴 일기가 더 진실될 때가 있거든. 물론 난 쉰이 넘도록 모국어로 일기를 쓴 적이 없어. 사실 난 아직도 모국어가 뭔지 잘 모르겠어. 이것 봐. 지금은 영어로 말하고 있잖아?
문보영 : 선생님은 몇 개의 언어를 하실 줄 아는 거예요!
포치 : 가만 보자, 음. 타갈로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어, 영어? 나이지리아에서 일할 때 독일 기업을 상대로 일을 했거든. 내게 모든 언어는 얼마간 불완전한데, 그 불완전한 언어로 써 내려간 일기들이 내겐 참 소중했어.
문보영 : 당신도 일기론자군요!
포치 : 너도 가끔은 영어로 일기 쓰지 않아?
문보영 : 하! 전혀요. 대신 전 일기장이 여러 권이에요. 정착 일기장과 이동 일기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정착 일기장은 한 장소에서 계속 쓰는 일기장이에요. 제 방에 한 권, 본가에 한 권, 스터디 카페 사물함에 한 권, 그리고 작업실에 한 권이 있죠. 모두 A4 사이즈인 데다가 무척 두꺼워요. 들고 다니기 힘들어서 두고 다녀요. 이동식 일기장은 제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가벼운 일기장이에요. 이동하는 시간에 쓸 수 있는 일기장이죠. 제 일기장들은 볼드모트가 자신의 영혼을 소분한 사물인 호크룩스와 비슷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많은 일기장을 쓰는 이유는 언제든 일기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이 나 일기장이 다 타버려도, 다른 일기장들은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볼드모트가 자신의 영혼을 여러 개의 사물에 나눠놓음으로써 영혼 하나가 파괴되어도 그 자신은 조금만 망가진 채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처럼요. 가끔 저는 일기장이 모두 파괴되면 나도 함께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포치 : 너 작가가 꿈이야? 이미 완전 작가인데?
문보영 : 아뇨! 전혀요. 저는 평범한 고등학교 체육 선생일 뿐인 걸요.
포치 : 그래도 계속 써서 좋은 곳에 보내봐.
문보영 : 그래도 좋겠네요. 아,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스터디 카페의 사물함 사용 기간이 끝났는데, 제가 지방에 있어서 짐을 찾아가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주인분이 일기장을 포함한 물품을 모두 처리하셨는데, 그로 인해 제 호크룩스 한 개가 파괴되었어요. 그런데 일기장이 사라지니까 기분이 묘하게 좋은 거예요. 볼드모트도 사실 해리 포터가 호크룩스를 찾아서 파괴할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괴성을 지른 건 아닐까요?
포치 : 하하! 사실 난 해리 포터를 안 봐서 몰라. 그런데 나라면 그 카페에 다시는 못 갈 것 같아!
선생님은 호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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