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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의 리걸 마인드] 법률사무소와 책방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월호
더 놀랍고 기쁜 사실은, 법조인들이 모여 있는 이곳을 떠나 서울 주택가에 동네 책방을 연다는 계획이었다. (2022.01.04)
예전에 내가 회사원이던 시절, 전문직들의 일과 여가는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출근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고 상사가 시키는 일을 주로 하는 회사원 입장에서 막연하게 생각했던 전문직이란, 스스로 일을 주도적으로 하고 알아서 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래서 상상했던 변호사의 일상은,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면 향긋한 커피부터 내려 마시고 배달된 종이 신문이나 주말에 못 읽었던 책을 방에서 조용히 읽는 장면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이것이 판타지로 판명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른 전문직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변호사들 역시 오랜 시간 노동하고 그 노동 강도 역시 과한 경우가 많았다. 낮엔 재판 출석이나 경찰 조사로 바쁘고 틈틈이 전화 통화를 하거나 의뢰인을 만나는 데 시간을 쓰다가, 밤이 되어서야 조용한 방에 갇혀 서면을 쓰는 게 변호사의 진짜 일상이었다. 지방 재판에 가면서도 내일 있을 또 다른 재판 준비를 위해 소송기록을 읽어야만 했으며, 오후 늦게 사무실에 도착하면 이미 오래 기다려 불만 가득한 의뢰인의 타박을 듣고 그의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이 와중에 방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변호사란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몇 년 전 대학 동아리 후배이기도 한 R 변호사가 술자리에서 “형, 이제 이 일을 그만두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 변호사들치고 “언제 이 일을 때려치울 수 있을까?”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하지 않은 자는 없었지만, R은 평소에 달리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호사 생활 10년차 우리들은 만성적인 야근과 급하게 먹는 김밥과 사나운 의뢰인들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사실 재판을 주로 하는 송무 변호사의 경우 지식 서비스 제공업자이자 동시에 감정 노동자이기도 하다. 법정에서 펼치는 공방은 단순히 어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실관계로부터 매끈하게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변호사들은 보통 사건의 당사자인 의뢰인이 나열하는 여러 증거와 진술을 토대로 법률적 주장과 사실을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고, 결국 변호사의 노동이란 법정 안보다 밖에서의 부대낌 사이에 더 많이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의뢰인은 변호사를 이용하거나 심지어 속이기도 하며, 법원과 의뢰인 사이에서 변호사는 이중적인 ‘을’의 위치에 서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감정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많은 변호사들이 재판이나 수사 결과에 따라 의뢰인으로부터 험하게 비난을 듣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고, 심지어 욕설을 듣거나 위협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일부 의뢰인들은 ‘변호사를 산다’는 말로 변호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오해하는데, 그렇게 기울어진 갑을 관계에 익숙해지면 변호사들 역시 굴욕적인 감정 노동을 수행하는 빈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미국 사회학자인 앨리 러셀 혹실드는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교환은 비슷하지만, 한 사람이 상대방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경우에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양쪽 모두 받아들인다.”고 정확히 간파한다. 이 때, “(낮은 지위에 있는 자의 위치에서) 격려하는 미소, 주의 깊게 듣는 것,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웃음, 지지와 감탄, 염려를 담은 평가 등 하인과 여성의 공경을 담은 행위들이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_(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 이매진(2009), 115쪽)
후배 R은 인정받는 노동 변호사였다. 여러 사건을 통해 많은 미디어에서 주목받기도 했던 R은 대학 시절에는 훌륭한 활동가이기도 했다. 내가 그와 학교를 다닌 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복학해서 만난 그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다니던 학교에서 스스로 청소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한국 대학 최초로 시설 노동자 노동조합을 만들어 내고 대학 본부와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만든 유능함은 이미 훌륭한 변호사를 예비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청소 노동자들에게 보인 헌신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정도다.
대학 졸업 후 변호사가 되어 R이 얼마나 정의롭고 올곧은 변호사로 일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증언할 수 있다. 그는 변호사로서도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위해 일했고 그들을 대변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런 그가 번 아웃을 선언하고 변호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였으니, 다른 동료들이 술 취해 했던 말과는 그 무게가 달랐다. 어찌됐든 술자리 말들은 술자리에 묻어 두는 게 낫다. 무언가를 그만두겠다는 급한 결심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R의 말은 한동안 기억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그가 지난 달 문자로 서초동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더 놀랍고 기쁜 사실은, 법조인들이 모여 있는 이곳을 떠나 서울 주택가에 동네 책방을 연다는 계획이었다. 아예 변호사 업무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법률사무소와 책방을 함께 한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책방 이름은 ‘밝은 책방’. 왜 밝은 책방일까? 어두운 법률을 다루는 우리의 일이 무언가로 덮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밝은 것이어야만 한다(순전히 내 생각이다). 의뢰인이 R과 법률 상담을 하러 와, 따뜻하고 환한 시집이나 소설 한 권을 건네받고 사무실을 나오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이것 역시 판타지일까. 내가 알기로 법률사무소를 개업하면서 카페를 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책방과 법률사무소를 함께 하는 경우는 ‘밝은 책방’이 한국 최초의 시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R은 ‘변호사가 운영하는 동네 책방’을 제목으로 SNS 홍보를 한다. 책방 한쪽엔 피아노와 기타가 놓여 있고, 강연, 세미나와 문화공연을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그가 밝힌 책방 개업의 변은 이렇다.
“책방을 연 것은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도전하기 위한 것이에요. 더 늦기 전에 이번 인생에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이제 나는 R이 변호사로서보다 동네 책방 주인으로서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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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그만두는 법』을 썼다.
<앨리 러셀 혹실드> 저/<이가람> 역15,300원(10% + 5%)
고객센터 상담원부터 마트의 판매사원까지, 친절과 미소를 강요당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회학자인 저자는 델타항공의 승무원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개인의 특성으로 여겨지던 감정이 상품화되고 있음에 주목했다.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회학 분야의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