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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누가 이 여자의 삶과 증언을 판결하는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영화
14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라스트 듀얼> 이후 이 세계는, 특히 여성의 삶은 얼마나 변화했을까. (2021.10.14)
미투(#METOO), 성폭력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일은 중세 시대에도 있었다. 지금처럼 운동(movement)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개인이 여성에게 불공정한 세상에 맞서 싸운 전례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는 에릭 재거의 동명 소설 『The Last Duel: A True Story of Crime, Scandal, and Trial by Combat in Medieval France』이 원작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이다.
14세기 프랑스 파리 한가운데서 한때 절친했던 장 드 카루즈(맷 데이먼)와 자크 드 그리(아담 드라이버)가 목숨을 건 ‘재판 결투’를 벌인다. 자크가 장의 아내 마그리트 드 카루즈(조디 코머)를 강간했는지 진실을 살피기 위해서다. 결백을 주장하는 자크를 향해 장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이번 결투를 무조건 승리로 이끌겠다고 전의를 다진다. 여기서 이기고 지는 게 진실 여부와 무슨 상관이 있나 싶지만, 신의 뜻에 따라 결투의 승패가 갈린다는 당시의 인식으로 인해 승자의 증언이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다시 말해, 패자는 거짓 증언을 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정작 마그리트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결투장의 한쪽에서 이 승부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다. 남편 장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마냥 응원할 수만은 없는 건 그가 결투에 나선 이유가 아내를 위한 복수인지, 개인의 명예 회복 때문인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인지 분간이 안 가서다. 부인이 남편의 재산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마그리트는 어렵게 용기를 끌어모아 장의 허락을 받고 이 자리에 섰다. 근데 마그리트의 존엄과 입장은 이번 결투의 허울뿐인 기사도에 밀려 완전히 배제된 듯한 인상이다.
<라스트 듀얼>은 제목만 보면 두 남자의 대결을 다룬 역사물 같지만, 실은 그 사연 속에 담긴 진실, 아니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마그리트가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자크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실은 하나이지만, 이에 대한 당사자와 주변의 반응은 처한 환경과 입장에 따라 제각각이다. 장은 왜 하필 경쟁 관계에 있는 자크이냐며 마그리트를 나무라고, 자크는 도덕과 윤리가 중요한들 사랑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마그리트에게 폭력 행위의 정당성을 강요한다.
사실을 흐릿하게 하여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 각자의 주장을 반영하기 위해 리들리 스콧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처럼 하나의 사건에 대한 장과 자크와 마그리트의 시선을 3개의 에피소드에 담아 소개한다. 각각 ‘장 드 카루즈가 말하는 진실’, ‘자크 드 그리가 말하는 진실’, ‘마그리트 드 카루즈가 말하는 진실’의 소제목을 달고 있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왜곡하고 부풀리기 마련이다. 장은 아내의 사건이 기사로서 자신의 품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크는 마그리트를 향한 자신의 행위는 순수한 사랑이었다는 식으로 증언을 풀어간다.
마그리트의 경우, 앞선 두 사람 증언의 제목 제시 형태와는 좀 다르다. ‘마그리트 드 카루즈가 말하는 진실 The Truth according to Marguerite de Carrouges’은 같지만, 최종적으로는 ‘진실 The Truth’만 남도록 마감했다. 리들리 스콧을 필두로 <라스트 듀얼>의 참여진 모두가 마그리트의 증언을 진실로 확정하며 그녀의 용기 있는 증언을 경유해 지금의 미투 운동을 가능하게 한 여성들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입장을 반영한 셈이다. <라쇼몽>의 형식을 차용했다고 해서 <라스트 듀얼>이 단순히 인간의 조건을 따져 묻는 영화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스트 듀얼>은 기억의 조작이란 것이 인간 존재의 특징임을 고려해도 가해자의 폭력을 지우고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하는 등 강자와 약자, 다수자와 소수자 등을 가려 작동하는 일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판결하듯 드러낸다. 그것은 익숙한 풍경이어서 예컨대, 장의 어머니이자 마그리트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아픔을 두고 우리 때는 다 참고 살았다며 그 때문에 결투를 벌여야 하는 남편을 사지로 몰았다는 식으로 마그리트를 비난한다. 마그리트의 친구는 자크가 잘 생겼다고 말했던 너의 잘못도 있지 않으냐며 마그리트의 증언의 순수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14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라스트 듀얼> 이후 이 세계는, 특히 여성의 삶은 얼마나 변화했을까. <라스트 듀얼>의 마지막 장면은 마그리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를 옆에 두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뉘앙스를 취한다. 여성의 삶이 여전히 (일부 몰지각한) 남성들에게 유린당하고 재판 결투와 같은 남성 지배적인 시스템에 의해 판결되는 세계를 계속해서 후세에 물려줄 것인가. 미투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미투 운동 그 이후의 더 나은 세상, 여성이 걱정 없이 사는 삶을 향한 바람과 변화의 촉구가 마그리트의 얼굴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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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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