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오후의 맥주 한 캔 – 김혜진
에세이스트의 하루 20편 – 김혜진
딸깍. 맥주 캔을 땄다. 꼴깍꼴깍 맥주를 마시는 나의 움직임에 주저함이 없다. (2021.09.29)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
딸깍. 맥주 캔을 땄다. 꼴깍꼴깍 맥주를 마시는 나의 움직임에 주저함이 없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맥주의 청량감으로 인해 뜨거웠던 체온이 순간적으로 내려가는 서늘함을 오소소소 느낀다. 탁.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수축되어 있던 감정은 확장된다. 그래, 이 찰나의 행복함을 위해 바쁜 하루의 일정을 종종거리며 뛰어다녔구나. 그제야 식탁의자에 털썩 앉는다. 잔뜩 성나 있던 근육이 이완되는 것을 느끼며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가을 햇볕은 어쩌면 이렇게 따가운지 아이들의 하교를 마중하고 학원을 데려다주기 위해 잠깐잠깐 길 위에 서 있던 시간만으로도 얼굴은 화끈거리고 온몸의 체온은 용광로의 쇳물처럼 달궈졌다. 오늘의 일정에 맞춰 이곳저곳을 이동하고 마지막으로 집 앞의 피아노 학원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는 혼자 집으로 들어왔다.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으니 앞으로 40여 분간은 혼자만의 시간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 앞에 선 채로 맥주 한 캔을 따서 꼴깍꼴깍 몇 모금을 삼키고 식탁의자에 앉았다. 거실의 소파에 앉으면 편할 텐데 혼자 있는 시간에는 나도 모르게 찾는 자리가 주방과 가장 가까운 식탁의 의자이다. 왜 그런지 이 자리에 앉는 것이 가장 편하다.
잠시 동안의 자유시간 동안 무얼 할까. 책을 뒤적여보다가 탁 덮는다. 아, 아니야. 조용한 시간에 글을 좀 써볼까. 노트북을 열고 타닥타닥 몇 글자 써보다가 그만두고 전원을 꺼버린다. 아, 이것도 아니야. 아무 방해 없이 뜨개에 몰입해보자. 그러다 식탁에 앉으면 마주 보이는 거실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게 된다. 내 주변은 명과 암으로만 이루어진 흑백의 배경이었던 조금 전과 달리 눈부신 자연의 색으로 채색되어 간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의 초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맥주 캔을 앞에 두고 호젓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문득 누군가와 함께 마시던 맥주를 생각하게 된다.
예전 친구들과 맥주 집에서 잔을 부딪치며 끝없는 이야기를 하던 일들이 아득하다. 시답잖은 농담들을 하며 시간을 죽이기도 하고,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며 따뜻한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가끔은 다툼이 있기도 하던 소란한 시간이었다. 그때의 맥주는 우리에게 약간의 흥분을 유발하고, 솔직함이나 관대함, 감정의 폭발 같은 것을 일으키는 모임의 윤활유와도 같았다. 우리는 불꽃이 되기도 하고 모닥불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화산이 되기도 했다. 삶이 어떤 모양과 색을 입을지 가늠할 수 없고 불안했던 그 시절의 맥주는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모험심을 일으켰다. 그때의 맥주는 쓰고 뜨거웠다.
지금 마시는 맥주는 나에게 그때의 맥주와는 반대의 기능을 한다. 예전의 다채로운 일상 속 불안감이 아닌, 매일의 반복 속에서 오는 무료함에서 나를 구해주는 친구와도 같다. 내 삶을 구체화해가고 그 생김새를 스스로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은 지금 마시는 맥주는 내 삶을 미화하고, 이해하고, 반성하게도 한다. 그런 작용들은 나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안도감과 청량감을 준다. 그리고 지금의 맥주는 일상 속 팽팽한 긴장감이나 조급함이 내 신경을 굳게 만들기 전에 나를 편안하게 녹이는 불꽃과 같기도 하다. 나의 감정을 숨기며 그것을 표출하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다가 굳어버릴 것 같은 때, 가끔 툭툭 털면 그 감정의 부스러기가 떨어질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는 나를 전율하게 하고 몸 안에 퍼지는 온기에 어느 순간 나는 녹아내리는 양초가 되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맥주를 예찬하는 나는 내 인생에서 맥주의 지분이 점점 넓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지만 사실은 몇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나는 한 캔의 맥주에도 그저 행복해진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피부가 빨개질 정도로 온몸 구석구석 퍼진 알코올의 영향으로 한없이 늘어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이 시간에 온전하게 나 자신에게 빠져들게 해주는 맥주 한 캔, 고맙다.
이렇게 꼬리를 무는 생각을 쫓아가다가 어느덧 40분의 시간이 지나버렸다. 현관의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버린 느낌이다. 이제 아이들을 맞이하고 저녁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의 메뉴는 된장찌개와 김치를 넣은 돼지고기볶음이다. 조용히 녹아있던 시간에서 깨어나 분주한 저녁시간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의자에서 일어나며 온 몸의 근육들을 다시 긴장시킨다. 완벽한 이완의 시간을 보낸 후의 긴장감이 나쁘지 않다. 무미건조하게 지나갈 뻔한 오늘이 맥주 한 캔을 마주한 오후의 40분으로 인해 총천연색의 빛깔을 입은, 빛나는 하루가 된 듯한 기분이다.
*김혜진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글이 되어 특별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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