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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특집] 사소한 몇 가지 여행 수칙 - 소설가 최민석

『월간 채널예스』 202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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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섬세한 A형 염소자리 작가이자, 과민대장증후군 환자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여행의 수칙을 정했다. (2021.08.10)

언스플래쉬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영국인 작가 콜린 퍼스가 포르투갈에서 반한 여성 ‘오렐리아’에게 청혼하러 간다. 이 소식이 퍼지자 현지인 수십 명이 현장에 동행한다. 장소는 오렐리아가 근무하는 식당.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란 식당 사장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누군가 “이 영국인이 오렐리아에게 청혼을 한대!”라고 하자, 식당 주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안 돼! 아멜리에는 우리 식당 최고의 웨이트리스야.”

사랑에 빠진 콜린 퍼스가 이런 반대에 무릎 꿇을 리 없다. 그는 열심히 외운 포르투갈어로 청혼을 하고 덧붙인다. ‘내가 포르투갈로 이사 와도 좋고, 같이 영국에 가서 살아도 좋다’고.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친구가 끼어든다. 

“영국에 가! 당연히 그래야지. 가서 윌리엄 왕자를 만나! 그리고 그와 결혼해!”

우리는 주인공의 시각으로 영화를 본다. 그렇기에 단역인 주민들의 반응이 감초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식당 주인의 말과 친구의 조언은 진심일 것이다. 당연히 식당 주인은 최고의 웨이트리스를 잃기 싫을 것이다. 친구라면 기왕 영국에 가는 김에, 판매 부수도 공개 안 한 작가보다는 왕자와 결혼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이방인과 현지인의 마음은 이렇게 다르다. 

여행을 갈 때, 우린 모두 이방인이 된다. 이 이방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여행 경비를 아껴야 하고, 추억에 남을 사진도 찍어야 하고, 지인을 달랠 선물도 사야 한다. 그 와중에 배탈이 나지 않게 신경도 써야 하고…. 현지인의 머릿속도 복잡하다. 현대인은 퇴근할 때면 잠시 시체가 되기에 조용히 쉬고 싶다. 하지만 관광지에서 살면 이때에도, 들뜬 이방인들의 여행 소감을 들어야 하고, 식당에서는 끊임없이 눌러대는 셔터 탓에 식사를 즐기기 어렵다. 도시 곳곳에서 질서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소음이 대신한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같은 도시에서는 시위까지 한다. 여행객을 반기지 않는다고.  

나는 섬세한 A형 염소자리 작가이자, 과민대장증후군 환자다. 만약 내가 사회적 의견을 감지하는 촉수를 모두 시각화했다면, 나는 메두사처럼 보일 것이다. 예민하다는 소리다. 아니, 예민하다는 표현 자체가 예민한 내 기분을 거스르므로, 섬세하다고 하자. 참고로, 하도 물어봐서 답하는데, 내 이름 ‘민석’의 ‘민’자는 ‘예민할 민’자가 아니다(애초에 ‘예민할 민’자라는 한자가 없다. 나 원 참… 억울해서). 그렇기에 나는 이런 ‘오버투어리즘’에 진저리 난 유럽인들의 심기를 그들의 눈빛에서, 손짓에서, 내게 다가오는 걸음걸이와 속도에서, 내게 답하는 어투의 고저에서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여행의 수칙을 정했다. 


1.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절대 외국어를 못해서가 아니다). 

2. 팁을 듬뿍  제공한다(그런 문화권이라면). 

3. 내 책을 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그들의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탁을 하지 않는다).

4. 방귀를 큰 소리로 뀌지 않는다(그렇다고 남몰래 소리 없이 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피해 줄 만한 짓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이리 간단한 걸 왜 에둘러 말했느냐 하면, 이렇게 지면을 채우는 게 생계형 작가의 자세다.(영차) 

이런 마음으로 남미로 갔고, 팔찌 행상의 판매 권유에 핑계를 대고 있을 때였다. 행상은 전직 대학 강사가 아니었나 싶을 만큼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선생은 21세기의 새로운 정복자요.” 그는 도심의 많은 집이 공유숙소로 바뀌며 원주민이 쫓겨났으니, 이제는 여행객이 제국주의 시대의 정복자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제국주의 시대 정복자와 달리 여행객들은 지칠 즈음엔 집으로 돌아가니, 지치는 사람은 원주민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다인종·다국적 연합군이라 했다. 듣다 보니 ‘이거 참 내가 미안하게 됐수다’라고 여행객을 대표해 사과하게 됐고, 어느새 그가 파는 하루치 팔찌를 모두 사고 난 후였다. 

정리하자면, ‘조금쯤은 당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여행한다. 그러면 실제로 바가지를 쓰기도 하고, 5분 거리를 30분 걸려서 돌아가기도 한다(지금 저한테 시티투어 시켜준 거죠? 고맙게도!).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그곳의 환경과 시스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 하지 않으려 한다. ‘아, 그 녀석 정말 호구였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간 여행 에세이에서 억울한 척했지만, 실은 별로 억울하지 않다(진정한 호구는 내 질문에 대답해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러면 환대까지는 아니라도, 여행객을 반대하는 데시벨이 세계 어느 도시에서는 조금이나마 줄지도 모르니까. 

여행 가방을 챙길 수만 있다면, 수칙을 4개가 아니라 20개로 늘려도 좋다. 호구가 아니라, 호구들의 호구가 되어도 좋다. 여행 가방의 먼지를 털어내고, 일상의 먼지도 털어내고 싶다. 이제는 더 꼼꼼하게 사람 마음도 챙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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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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