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새로운 것에 머리가 노출되는 순간 (G. 정세랑 작가)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196회)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지금 제 옆에 “익숙한 것들을 끝없이 의심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놀랍게도 최근 첫 번째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쓰신 정세랑 작가님 나오셨습니다. (2021.07.15)
일상은 상실감을 주지 않는데 여행은 상실감을 주기 때문에 마음이 그리는 곡선이 부담스러워서 여행을 저어했는지도 모르겠다. 떠나면 분명 희열에 찰 테지만 그 희열이 보존되지 못하고 제어할 수 없는 틈으로 가루처럼 흐를 것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영영 비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이 책의 장면들은 흩어져 사라진 것들 뒤에 남은 잔여니까. 모래 그림을 보존하려는 노력처럼, 사람들이 기록하고 또 기록하며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하려 애쓰는 게 좋다. 그러다 보면 아주 희귀한 알갱이들이 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정세랑 작가님의 첫 번째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에서 한 대목을 읽어드렸습니다. 여행을 즐기지 않는 정세랑 작가님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혹은 상황에 의해 떠밀리듯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요. 뉴욕으로, 오사카로, 런던으로 떠난 그 여행은 뜻밖에도 어떤 씨앗이 되어 다양한 자국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말하죠. 이제 여행의 기회는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싶다고요.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정세랑 작가님이 함께 합니다. ‘환경주의자’ 정세랑 작가님의 여행과 다채로운 생활에 관한 이야기 나눌게요.
오은: 에세이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이번이 첫 번째 에세이에요.
정세랑: 사실은 소설을 세 권 정도 내고 에세이가 나오는 게 제일 좋았을 것 같은데요. 제가 마감을 못해서(웃음) 늦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은: 우선 정세랑 작가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평생을 걸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평범한 선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터미네이터>, <쥬라기 공원>, <백 투 더 퓨처> 같은 영화와 다양한 TV 만화영화를 애벌레처럼 집어 삼키며, 범우사 세계문학선과 솔 세계문학판 같은 것을 사 모으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극적인 동화의 결말은 직접 수정해 읽었고, ‘바람의 나라’ 같은 게임도 많이 하며 성장했다. 그 시절 읽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산적의 딸 로냐>는 지금까지도 책을 간직하고 있다. 자주 아팠던 청소년 시기를 보낸 정세랑은 쉽게 경이로워 하는 성인이 된다. 대학 시절에는 라틴어 수업, 불교미술 수업 등 다양한 분야를 탐험했고, 역사교육을 전공했는데 온갖 상상력을 가미한 리포트를 자주 제출해 교수님들로부터 “역사보다는 국문학이 적성에 더 맞겠다”는 조언을 듣곤 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우연은 어린이책 편집자로 입사했으나 성인문학 편집자로 일하게 된 것. 가장 현재의 소설들을 보면서 나도 써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번번이 공모전 최종심에서 떨어졌다. 자신의 소설이 ‘장르적’이라는 평가를 듣자 정세랑은 2010년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데뷔해버린다. 늘 경계에 서서,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해온 소설가 정세랑. 그는 가장 이상한 거 많이 해본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관심 있는 주제가 생기면 5-6년 동안 정보를 끌어 모으는 ‘정보호더형’ 작가, 지금까지 발표한 장편소설 여섯 편에 등장인물이 약 260여명이나 되는 ‘사람형’ 작가. 유독 봄에 내성적이 된다. 좋아하는 것은 여름, 아무 목적 없는 버스 타기, 사전, 그리고 제인 오스틴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책을 읽고 싶다. 원하는 초능력은 항상 순간 이동이고, 닮고 싶은 새는 딱따구리다. 먼 미래의 꿈은 젊은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는 할머니작가가 되는 것이다.” 어릴 때 비극적인 동화의 결말을 직접 수정해서 읽었다고요? 동화를 어떤 식으로 각색에서 읽었는지 궁금한데요.
정세랑: 인어공주가 안 죽는 거죠.(웃음) 이면지에 색연필 같은 걸로 적고 그랬어요.
오은: 작가님이 어린이책 편집자로 입사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요. 어린이책도 작가님과 정말 잘 어울려요.
정세랑: 어린이책을 너무 좋아해서 어린이책 편집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험 보고, 면접 보고, 거의 최종 확정이 됐는데 내부에서 어린이팀으로 옮기고 싶다고 한 경력자 분이 계셨던 거예요. 운명이 바뀌어서 얼떨결에 성인팀으로 가게 됐어요. 제 꿈은 동화 작가님들과 차와 쿠키를 먹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술고래 사람들 사이에 떨어져버린 거죠.(웃음) 인생은 이렇게 바뀌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오은: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 텐데요. 먼저 작가님께서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가 어떤 책인지 직접 소개해주세요.
정세랑: 제가 여행 에세이 읽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이렇게 좋아하는 영역이니까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행 갈 때마다 기록을 아주 철저히 했죠. 매일매일 자세히 적고, 사진도 찍어두고 그랬는데요. 막상 쓰려고 하니까 하나의 키워드로 잘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그것들을 쌓아두기만 하던 상태였다가 여행이 멈추자 그때 내가 누렸던 자유는 뭐였지, 이렇게 많은 혜택들을 행운인지도 모르고 누리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됐어요. 그러면서 하나의 주제로 글을 쓸 수 있겠더라고요.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그렇게 느리게 느리게 여과되고, 정리된 그런 여행기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은: 어쨌든 책의 상당한 두께가 작가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책을 고민해 왔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정세랑: 그럼 대답을 두꺼워서 오래 걸렸다고 해야겠어요.(웃음)
오은: 소설도 그렇지만 이 책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지인 외에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대목이 정말 좋았어요.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묻는 태도는 다른 것 같아요. 특히 어떤 재해가 생겼을 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안전할지 걱정하면서 마음을 쓰는 게 좋았고요. 그래서 다녀온 여행지가 많아질수록 예민해지게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많이 다녀왔다는 것은 내가 많은 곳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도 되니까요.
정세랑: 그래서 뉴스 보는 게 더 힘들어져요. 어느 지역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혹시나 내가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이 휘말렸으면 어떡하지, 이런 마음들이 들어서요. 무언가를 많이 좋아하는 건 더 많이 슬퍼지는 일인 것 같아요.
오은: 미술관도 많이 등장해요. 어디에 가든 꼭 그곳에 있는 미술관을 방문하시는데요. 미술관에서 어떤 자극을 받는 건가요?
정세랑: 언어가 통하는 데도 있지만 통하지 않는 데가 훨씬 많잖아요. 그럴 때 그 언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곳이 미술관 같아요. 이 사회는 어떤 사회구나, 여기 사람들은 이런 걸 고민하고,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걸 두려워 하는 구나, 하는 게 확 와 닿는 곳이거든요. 즉각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미술 작품인 것 같고요. 그런 작품들을 봤을 때 되게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이렇게 아름답고 새롭고 짜릿한 걸 보기 위해 사는구나 많이 생각하게 돼요.
오은: 저는 이 책이 머뭇거린 어떤 순간들에 대한 기록인 것 같기도 했는데요. 여행에서 마주친 명쾌한 순간들은 금방 잊히잖아요. 저게 좋구나, 저게 근사하구나, 하고 잊히는데 저게 왜 그렇지, 어떻게 다르지, 애매모호하거나 복잡하거나 다층적이어서 머뭇거렸던 순간들이 오히려 더 기록이 되는 것 같거든요. 여행을 해보지 않으면 쓸 수 없었던 것들을 쓰게 만드는 거죠.
정세랑: 어떤 소재나 공간을 봤을 때의 느낌도 중요하긴 한데요. 저는 그냥 새로운 것들에 노출되었을 때 머리가 혼자서 막 움직이는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그건 의도와 별로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 같은데, 누구나 그렇잖아요. 새로운 곳에 가면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고, 생각의 결이 바뀌기도 하고요. 그걸 여행을 가서 얻어야지, 하고 얻는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난 일일 경우가 많아서요. 그렇게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 좋은 것 같아요.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세랑: 데버라 리비의 『살림 비용』이에요. 되게 노랗고 작은 책인데요. 저자가 삶의 변화가 굉장히 많은 시기에 자신의 삶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쓴 에세이인데요. 길지도 않고,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문장 하나 하나가 생각나고, 오랫동안 읽게 되더라고요. 이 책은 요약할 수가 없어요. 요약을 하면 되게 이상해져요. 전기 자전거를 타고 헛간에서 글을 쓰는, 이 정도밖에 생각이 안 되는데요. 그 내용이 아니거든요. 정말 좋은 글은 요약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이 책도 요약이 되지 않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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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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