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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대화에도 퇴고가 가능하다면

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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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말을 통해 타인을 언짢게 할 수도,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처럼 대화에도 퇴고의 기회가 있다. (2021.05.24)

언스플래쉬

책상 앞에 앉는다. 초고를 쓴다. 퇴고한다. 글쓰기의 세 단계 중에 나는 마지막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쓰는 사람 대부분이 그럴 테지만, 나는 퇴고 강박이 있다. 마감이 2주 남았다면 하루는 초고를 쓰고 남은 13일은 퇴고에 퇴고를 반복한다. 가끔 동료들에게 피드백을 부탁하면 동료들은 묻는다. “이거 또 다음 달까지 보내는 원고지?”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강박 인간인 게 틀림없다.

퇴고할 때는 몇 가지 기준으로 글을 점검한다. 글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방향을 잡고, 너저분한 문장을 정리한다. 가장 촉각을 세우는 부분은 다른 존재를 배제하는 표현이나 관점 경계하기. 초고에서 툭 튀어나온 차별적인 표현이 있다면 후딱 지우고 다듬으면서 역시 퇴고하길 잘했다고 안심한다. 공들여 쓴 글도 다시 읽으면 실수하거나 놓친 부분이 보인다. 그날 밤은 잠을 설치고, 다음에는 더 섬세해보자고 다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잠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말’이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돌아온 밤이면 내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혹시 실수한 거 없었나? 너무 내 얘기만 늘어놓은 건 아닐까? 아무래도 그 얘긴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 말은 불편하다고 바로 말할 걸 그랬어. ‘글 실수’라는 표현은 어색하지만, ‘말실수’라는 표현은 익숙한 걸 보면 아무래도 말은 실수하거나 놓치기 쉬운 수단인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랐다. 대화에도 퇴고가 가능하면 좋겠다고.

무늬는 퇴고하듯 말하는 사람이다. 3년 전 무늬를 처음 만난 가을, 무늬는 가방에서 작은 스프링 노트와 연필 하나를 꺼냈다. 대화하는 동안 무늬는 간간이 노트에 단어와 짧은 문장을 적었다. 말을 꺼내기 전에 한 번, 내 말을 들을 때 한 번씩 노트를 필터처럼 사용했다. 무늬는 대화의 템포가 느긋한 편이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속도였지만, 점점 나는 무늬가 고르고 고른 뒤에 입 밖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빠졌다. 말실수하고 이불을 발로 차는 밤이 무늬에게는 분명 적을 거로 생각했다.

무늬가 말을 잘하고 싶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깜짝 놀라 물었다. “무늬가 말을 못한다고요? 저는 정말 무늬처럼 말하고 싶은데. 무늬는 실수하는 일도 없잖아요.” “저는 생각하고 표현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잖아요. 승은처럼 즉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그리고 저도 말실수할 때가 있어요.” 그날 무늬와 나는 우리가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재미있어서 깔깔대며 웃었다.

지난 3년간 무늬와 관계 맺으면서, 나는 무늬에게 조심스러운 말하기만큼 사과할 용기를 배웠다. 무늬도 가끔 말실수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사과한다. 무늬는 나와 헤어진 뒤에 가끔 메시지를 보낼 때가 있다. “제가 오늘 승은에게 이런 농담을 했는데, 혹시 승은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싶어서요.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꼭 알려주세요.”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섬세하게 고민하고 표현하는 무늬를 보면서, 나는 만약 대화에 퇴고가 가능하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생각했다.

살면서 상처 준 사람에게 “제발 나한테 사과해줘”라고 애원하듯 말한 적이 정말 많았다. 아마 누군가도 나에게 같은 심정을 느꼈을 거다. 얼마 전 영화 〈세 자매〉를 볼 때,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세 자매가 성인이 된 뒤 아버지에게 평생의 한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말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사과하세요. 제대로 사과하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고 딸들이 보는 앞에서 자해한다. 차마 입 밖으로 잘못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아버지.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와 얼마나 다른 인간인가 생각했다. 상처를 되돌릴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제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사과만으로 봉합되는 상처는 없겠지만, 봉합은 진심 어린 사과에서부터 비로소 한 땀 엮인다.

몇 년 전, 세 장 분량의 긴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발신자는 강연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기수였다. 그날 기수는 술에 취해 나와 동료들에게 “엄청 조용한 편이시네요? 원래 이렇게 조용한 사람들끼리 어울려요? 무슨 재미로 만나요?”라고 말했는데, 그때 나와 동료들은 기수의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기수는 얼마 되지 않아 지인을 통해 빽빽하게 채운 편지를 전했다. ‘제가 그날 술이 과해서 농담이랍시고 무례하게 말했습니다. 승은 님과 동료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해요. 앞으로 술을 절제하고 조심하기로 다짐했어요. 행동으로 보여드릴게요.’ 그 뒤로 기수는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았고, 나와도 가까운 사이가 되어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할 용기가 기수에겐 있었고, 나는 그런 기수를 신뢰하게 되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말을 통해 타인을 언짢게 할 수도,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처럼 대화에도 퇴고의 기회가 있다. 진심으로, 너무 늦지 않게 사과하는 것. 그 일에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사과하면 불리해질 거라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사과하기. 나는 사과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너무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나는 바란다. 말을 뱉기 전에 신중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보다 기꺼이 사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고를 쓴 뒤에 여러 번 퇴고하며 보다 무해한 글로 다듬듯, 말을 뱉은 뒤에도 퇴고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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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승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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