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캐릭터는 옷이랑 비슷해요 (G. 문소리 배우)
책읽아웃 - 김하나의 측면돌파 (175회)
이제는 그런 바람이 저 멀리서 불어오고 있다는 게, 아직 강풍은 아니지만 불어오고 있다는 게 슬슬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이 됐지만 끝까지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2021.02.18)
있잖아요 언니 나는, 그게 가장 무서워요. / 눈빛이 닮아가는 것. / 어떤 종류의, 아니 모든 폭력은 유전되니까요. / 그것은 일생을 지배한 뒤 대물림되고 / 세대를 거듭하고 시대를 관통해요. / 아이들은 닮아가겠죠, 엄마와 아빠의 눈빛을. / 아버지의 눈빛을 닮은 나의 눈빛을. / 눈빛이라니 언니, 안 돼요 그것만은. / 우리의 딸들은 그래서는. // 생각해요 그 밤을. 어둠 속으로 흩어지던 연약한 입김을. / 그때 맨발의 긴급함에 누군가 응답했다면 /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 그들의 손이, 우리를 손가락질하지 않고 / 곱은 손을 잡고 함께 돌아와주는 손이었다면. / 멈추게 하는 손이었다면. / 그래요, 이제 와 이렇게 생각하는 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 그렇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언니, 다 헛되고 부질없을까요. / 지금도 얼마나 많은 맨발이 겨울밤을 질주하는데요. / 얼마나 많은 몸에 검은 꽃이 피는데요.
책 『세 자매 이야기』에 실린 허은실 시인의 시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오늘은 영화인 한 분을 모셨습니다.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제작자로서 ‘믿고 보는 영화’를 만드는 분이에요. 최근, 배우와 공동제작으로 참여하신 영화 <세자매>가 개봉을 했고 그 이야기를 담은 책 『세 자매 이야기』가 출간됐는데요. 책의 공동 저자로서 <김하나의 측면돌파>를 찾아주셨습니다. 문소리 배우님입니다.
김하나 : 문소리 배우님이 『세 자매 이야기』 책에 공동저자로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현장스케치를 직접 쓰셨더라고요.
문소리 : 사실 밥숟가락만 얹은 분위기이기도 한데(웃음), 기획을 제가 시작했죠. 같이 프로듀싱한 김상수 프로듀서한테 이런 책을 냈으면 좋겠다고 영화 개봉 훨씬 전부터 제안을 했었어요. 그래서 출판사 섭외부터 책의 구성, 필자 섭외, 내용과 그 중에 한 꼭지 ‘포토 현장 에세이’를 제가 썼으면 좋겠다는 기획과 진행을 제가 전반적으로 했고요. 하지만 이 책의 정수는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무삭제판으로 들어있다는 거죠.
김하나 : 물론 이 책이 각본집으로 나온 거니까 이승원 감독님이 쓰신 시나리오가 중간에 실려 있지만 책이 정말 빵빵하더라고요.
문소리 : 네, 저도 영화하면서 몇 권의 각본집을 보기는 했는데 조금 더 알차게 담아보고 싶었어요.
김하나 :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이 책을 봄으로 인해서 뭔가가 딱 합치되면서 더 즐기게 되는 부분이 많이 있던데요. (책이) 처음 시작할 때, 캐스팅이 확정되고 나서 세 자매를 맡은 세 배우님들이 문소리 배우님 집에서 모임을 가졌던 모습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에는 약간 얼큰하게 취해계신 것 같은데...
문소리 : 네, 만취죠(웃음).
김하나 : (웃음) 저는 이 사진으로 시작하는 게 너무 좋아요. 이 세 자매님들이 영화 안에서는 정말 치열한 부분이 있고 보기 힘든 부분도 있고 각자 감내해야 되는 고통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실시간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책을 딱 열었더니 이 세 자매로 캐스팅된 분들이 만취한 채...(웃음)
문소리 : 이 사진들이 대부분 제 폰으로 찍은 사진들이에요. 제가 프로듀서이기도 하니까 모든 현장에 계속 있었고 현장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다 모아서 정리해서 뽑은 사진인데, 사실 캐스팅 확정 전에도 프로덕션이 시작되기 전까지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으나, 그걸 모두 뒤로 하고 저 사진부터 시작하고 싶었어요. 가장 기쁜 날이었어요.
김하나 : 정말 좋은 판단입니다. 사진 세 컷이 있는 이 페이지(16쪽)이 너무 좋은 게, 만취한 세 분의 배우가 계시고 그 아래에는 세 분의 각자의 딸들이 셋이 놀고 있는 장면이 작게 들어가 있어요. 이게 이 영화의 외연을 너무 멋지게 확장시켜주는 느낌이었어요.
문소리 : 우연히 만나고 보니 셋 다 딸이 있고, 그 딸들이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노는 게 너무 예뻤어요. 이게 우리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딸들을 위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귀가 딱 맞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을 했죠(웃음).
김하나 : 이 때가 언제인가요?
문소리 : (세 배우가) 처음 만났을 때가 2019년 12월이었고요. 2020년 2월 중순에 영화 촬영을 시작했죠.
김하나 : 그때 코로나가 폭발하기 시작하던 때였던 거죠?
문소리 : 네.
김하나 : 그러면 영화 촬영이 끝난 건 언제인가요?
문소리 : 3월에 끝났어요.
김하나 : 그 뒤로는 후반 작업들이 있었을 테고.
문소리 : 네. 후반 작업이 있고 기다렸다가, 이렇게 극장이 밤 9시 이후로 영업을 안 하고 5인 이상 집합금지가 걸린 지금 개봉을 하게 됐어요. 팔자가 기구해요(웃음).
김하나 : (웃음) 이런 파란만장함을 거쳐서 지금 <세자매>가 개봉을 하고 『세 자매 이야기』 책도 나왔는데요. 현장 스케치 담당으로 참여를 하시기도 했지만 공동제작자로도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문소리 : 네. 보통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통해서 캐스팅 제의를 받게 되면 처음에 그렇게 시작해요. 매니저가 ‘영화사 ‘업’에서 ‘세자매’라는 시나리오가 왔어요,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받자마자 첫 장을 넘기기 전에 감독이 누구인지 보고 ‘이 감독 뭐 한 사람이지?’ 부터 해서 ‘영화사 업은 어떤 데지? 지금 투자가 어디래? 촬영 언제 들어간대? 버젯이 어느 정도 오지? 그 중에 나는 어떤 역할이지?’ 이런 걸 개괄적으로 정보를 가지고 시나리오 첫 장을 넘겨요. 그런데 이 영화는 이승원 감독이 저한테 시나리오를 직접 보냈어요. 그 전에도 인연이 있어서.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아무것도 질문할 게 없었어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고, 그냥 컴퓨터에서 파일이 생기자마자 감독님이 저한테 먼저 보내주신 거예요(웃음). 시나리오가 힘이 있길래 감독님이랑 김상수 프로듀서랑 셋이 종종 만나서 ‘이걸 만들어봤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어쩐다...’ 하고 이야기를 했죠. 회의를 여러 번 하다가 어느 날 김상수 프로듀서가 ‘공동 프로듀서(coproducer)를 하시면 어떻겠느냐, 지금 계속 공동 프로듀서 역할을 해오고 계신다, 이 작품의 배우로만 크레딧에 올릴 수는 없다, 시원하게 직함을 받으시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셔도 된다’ 그래서 ‘직함 갖는 게 더 부담스러운데, 안 갖고도 할 수 있는데’ 하다가(웃음), 내외적으로 그게 더 도움이 된다면 하겠다고 해서 제가 받고, 제 남편과 제가 만든 영화사 ‘연두’의 공동 제작으로 하게 됐죠.
김하나 : 그 영화사(연두)의 첫 작품은 <여배우는 오늘도>였고...
문소리 : 두 번째가 <1987> 공동 제작이었고, 세 번째가 지금 <세자매> 공동 제작한 거예요.
김하나 :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책을 만들 때도 그렇고 영화를 만들 때도 그렇고, 아예 안 하면 모를까 이걸 해볼까 싶으면 생각보다 아주 적극적으로 의견도 많이 내시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문소리 : 좀... 질린다는 소리를 종종 들을 만큼, ‘쟤 좀 질리는 스타일인데?’ 할 만큼(웃음), 일은 좀 끝장을 보자고 생각해서...
김하나 : 질린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세자매> 중에 둘째인 ‘미연’ 역할을 맡으셨는데, 미연 역할을 처음 봤을 때 뭔가 징글징글한 느낌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문소리 : 그 부분이 비슷한 거예요, 조금 질리는 그 부분이. 미연이도 좀 질리는 스타일이에요.
김하나 : ‘좀’이 아니죠(웃음).
문소리 : 네, 좀 많이. 겉으로 보이는 사는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질릴 정도로 징글징글한 내면의 한 구석이 저랑 조금 닮은 구석이 있는데, 제가 제 안의 어떤 부분 중에 그렇게 좋아하는 부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가끔 가까운 사람들한테 뭐 하다가도 ‘왜, 나 좀 질리는 것 같니?’ 제가 먼저 고백하고 물어봐요(웃음). 제가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고 그걸 다른 식으로 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그래야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노력하는 부분인데, 미연이는 그걸 그대로 가져가야 되니까 그게 조금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남편) 장준환 씨의 말로는 ‘인간 잘 안 변하고, 그런 부분이 조금 있어도 괜찮은 인간이니까 너무 안달복달 하지 말아라’ 이렇게 이야기도 하는데, 어쨌든 남들이 뭐라 하든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 부분을 미연이가 갖고 있는데 그게 나랑 너무 닮아서, 그래서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김하나 : 『세 자매 이야기』 제일 처음에 보면 허은실 시인의 시가 있는데, 저는 이 구절이 탁 와 닿았어요. “그렇게 나는 언니의 상처에 연루되고 싶어요. / 언니의 삶에 가담하고 싶어요.”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에서 확 코가 꿰이고 마셨는지 궁금해요.
문소리 : 사실 캐릭터는 옷이랑 비슷해요, 저한테는. 느낌이. 내가 오늘 이 옷을 입기 싫은데 입어야 되는 날이 있잖아요. 결혼식에 가야 되거나 그럴 때, 그런 옷을 별로 입고 싶지 않아요. 그냥 스니커즈나 운동화 신는 거 좋아하고. 그런데 조금 차려입고 가야될 때가 있어요. 그 옷을 입기 싫은 마음보다는 그 자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예요. 그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죠. 그런 것처럼 캐릭터는 어떤 옷을 입느냐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이 이야기가 갖고 있는 맥락, 감독님의 스타일과 그러면서도 따뜻한 어떤 시선. 이런 것들이 되게 좋고 이런 영화가 한국영화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김하나 : 이건 신들의 격돌이라고 해야 되나요, 격돌이 아니라 협연이라고 해야 될까요. 캐스팅이 정말 엄청난 것 같아요. 세 자매 이야기이고 세 명의 주연 배우가 확정이 되고 나서 ‘여자 세 명이 주연이라고 하는 장벽 때문에 투자를 받기가 어려웠다’라는 말들도 있었습니다. 남성 주연 투톱이라든가 이런 영화가 훨씬 더 투자를 잘 받나요?
문소리 : 앞으로도 투자를 잘 받아야 되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는데(웃음)...
김하나 : (웃음)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문소리 : 저는 <1987> 만드는 과정도 봤고, 주변에서 제 친구들도 프로듀서를 하니까 많은 영화들을 만드는 과정들을 보고, 또 제가 나왔던 여러 영화들 만드는 과정들도 지금까지 지켜봤을 거 아니에요. 어떤 영화든 어려움이 없는 영화는 없죠. 제작에 있어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 책 한 권에 담을 수 없는 사연들이 많죠. <세자매>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런데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워요. 여성 셋이, 특히 기혼여성 셋이 주인공이어서, 거기에서 어려움이 기인한 거라고 딱 잘라 말하기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 있기도 해요. 이 작품이 갖는 여러 가지 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코로나 시국도 작용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쳐있을 수 있는데 이유를 한 가지만으로 대기가... 그렇게 사는 게 간단하지는 않잖아요. 특히 전 과정을 아는 저로서는... 솔직히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것이 영향을 크게 미쳤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저 나름대로의 분석은 있어요. 그런데 이런 성공 사례가 없어요.
김하나 : 기혼 여성 세 명이 주연을 해서 성공을 한 사례가 이전에 없다.
문소리 : 네, 없죠. 그리고 이런 서사와 이런 사이즈의 영화로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가 흥행을 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투자하는 입장에서는 어려웠겠죠. 그런 데이터가 아직 한국영화 역사에서 쌓여있지 않은 것이 아마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고, 책임이라면 그냥 역사의 책임이죠(웃음).
김하나 : 그건 달리 말하자면 그런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는 거죠.
문소리 : 그런 시작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제는 그런 바람이 저 멀리서 불어오고 있다는 게, 아직 강풍은 아니지만 불어오고 있다는 게 슬슬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이 됐지만 끝까지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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