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특집] 김보영 월드로 입장하시죠
<월간 채널예스> 2020년 2월호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는 문학이 SF라면 우리는 이미 SF의 세례 속에서 살아온 셈이죠. (2020.02.17)
김보영의 저자 소개는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로 시작한다. 본인은 변명하고 싶어 하지만 SF 팬들도, SF 작가들도 이견은 없다. 2004년 「촉각의 경험」이 제1회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 중편 부문에 만장일치로 당선되며 등장한 이래 쉼 없이 SF를 써왔으며, 그 시간 사이사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 웹진 <클락스월드 매거진>에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작품을 게재했고, 미국 최대의 출판 그룹 하퍼콜린스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포함해 세 권의 판권 계약을 하는 등 수식어에 어울리는 이슈를 생성했다.
SF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면을 가리지 않고 담대하게 밝혀왔다. “늘 말하지만, 우리는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에는 과학 소설이 사회 소설이며 우리의 현실을 가장 직설적으로 반영하는 문학이다.” (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서문 중)
한국 SF가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어요. 작년 말 『오늘의 SF』 창간을 즈음해서는 거의 모든 신문이 한국 SF의 부흥을 다룰 정도였죠.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정말 많은 일들이, 폭발적인 에너지로, 한꺼번에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생각해요. 2017년이 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특히 페미니즘 이슈와의 융합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페미니즘을 먼저 주목한 장르가 SF였으니까요. 마침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 출간 200주년을 맞은 해였는데, 이 작품 속 페미니즘 요소들이 재조명됐고, 또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이자 SF이기도 한 『이갈리아의 딸들』 도 크게 화제가 됐고요. 페미니즘 문학은 SF일 수밖에 없어요. 항상 미래를 생각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생각해야 하고, 현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무언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죠. 조남주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 『사하맨션』 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박상준 작가, 심완선 평론가와 함께 <한국일보>에 연재한 글들을 묶어 작년 말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냈어요. 이 또한 연장선에 있겠죠?
나름의 계기는 됐다고 생각해요. 연재를 통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SF는 특별한 문학이 아니다’라는 거였어요. 헤르만 헤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 도 SF예요.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는 문학이 SF라면 우리는 이미 SF의 세례 속에서 살아온 셈이죠.
하퍼콜린스와 계약한 작품들이 2021년 미국에서 출간돼요.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나요?
번역을 마친 상태예요. 하퍼콜린스에서 엄청난 양의 코멘트를 달아서 제게 보내줬죠. 혹시 모르는 일이니 다른 작가들도 꼭 시도해보면 좋겠어요. <클락스월드 매거진>에 「진화신화」를 싣게 된 것도, 순전히 팬이라는 이유로 제 작품을 번역해준 부부가 ‘제일 유명한 곳부터 투고해보자’고 제안한 게 계기였어요. 하퍼콜린스가 컨택해오기까지 제가 한 일이라고는 도서전 매대에 책을 올려둔 것뿐이었고요. 제 생각은 이래요. 한국 SF는 정말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갈고닦은 작품들이기 때문에 우리 생각보다 수준이 아주 높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SF 작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첫 작품집 『멀리 가는 이야기』 수록 작품들을 쓴 2000년대 중반은 한국 작가의 SF가 낯설게 받아들여지던 시기였잖아요.
저는 정말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썼어요. 저희 집도 한국의 여느 가정집과 마찬가지로 양질의 문학 서적이 많지 않았어요. TV에서 본 만화를 비롯해 모든 것을 버무려 이야기를 만들었죠. 그런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건 환상소설이에요. 실상 인류가 쓴 최초의 이야기는 신화, 그러니까 환상소설이잖아요. 고등학생 때 제가 쓰는 이야기들은 출간될 수 없겠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작가가 되는 걸 포기했어요. 대학 졸업 후에는 게임 시나리오를 쓰며 살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딱 한 권만 쓰고 모든 미련을 버리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회사를 그만두고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여기까지 왔고요.
클론에서 명계까지, 다양한 소재로 작품을 쓰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다양하지 않을 수 있죠? 하하. 제가 소설을 쓰는 방식도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저는 먼저 쓴 이야기에서 다음 이야기를 연상해요. 「촉각의 경험」에서 ‘감각’을 채집해 「다섯 번째 감각」을 썼고, 이 이야기에서 연상한 것들로 「종의 기원」을 썼어요.
대부분의 작품에 사회적 소수자가 등장해요. 2017년 출간된 『얼마나 닮았을까?』에서는 주인공인 AI가 나중에야 상대의 성별을 인지하는 점이 인상적이더군요. 『저 이승의 선지자』 의 등장인물들도 성별이 없죠.
모든 사람에게 소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소수성을 위해 항상 투쟁해야 저 또한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죠. 그런 세상을 구축하는 데에는 과학적 세계관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젠더 문제만 해도 ‘생물학적으로 남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과학적 사실로 설명할 때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요.
모든 작품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있을까요?
아톰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세계는 한마디로 ‘생명에 대한 찬가’예요. 필생의 주제를 하나만 꼽으라면, 이걸로 하고 싶어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때로는 ‘왜 이 모양이야?’ 하고 실망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존엄해요. 어쩌면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가 대멸망을 향해 가고 있을지언정, 지금 이 순간의 찬란함에 대해서는 찬사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점에서 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동양적 세계관은 고마운 존재예요. 동양적 세계관에서 모든 사물은 살아 있어요. 대척점에 있는 서양적 세계관, 또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을 심하게 분리하죠. 인간과 다른 존재를, 현재와 미래를, 선과 악을, 신과 나를. 이에 비해 우리 SF 작가들은 활짝 열릴 잠재력을 갖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김보영 월드에 입성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절판된 책이 워낙 많아요. 다행히 올해 일부 작품이 재간돼요. 봄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그 속편, 그리고 초기 작품 가운데 이 둘과 세계관이 이어지는 『미래로 가는 사람들』이 함께 나와요. 이어 최근작을 모은 새 단편집이 출간될 거고요. 이 이야기들로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요? 『종의 기원』은 좀 더 기다리셔야 해요. 장편화해서 다시 내놓을 거예요.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김보영, 박상준, 심완선 저 | 돌베개
인공 지능(AI)와 로봇 등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가져올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해 왔던 예술적 전통과 그것이 실현된 오늘의 현실적 조건을 결합시켜서 지금부터 펼쳐질 새로운 과학의 서사를 거침없이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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