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클리셰를 통해 본 영화와 듀나의 역사
책읽아웃 - 김하나의 측면돌파 (119회)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여름의 책』 『내가 죽은 뒤에 네가 해야 할 일들』
시작은 책이었으나 끝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코너, 삼천포책방입니다. (2020. 01. 23)
듀나 작가가 깨알 같이 모아놓은 클리셰 이야기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 토베 얀손이 쓴 ‘동작과 사색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가 담긴 『여름의 책』 , 엄마가 딸에게 남기는 삶의 처방전이 실린 『내가 죽은 뒤에 네가 해야 할 일들』 을 준비했습니다.
단호박의 선택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듀나 저 | 제우미디어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에요. 이다혜 기자님은 추천사에 “이렇게나 재미있는 사전이라니”라고 쓰셨어요. 듀나 작가가 운영하는 게시판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듀나 게시판’, ‘듀게’라고 부르는데요. 그 게시판에 듀나 작가님이 썼던 글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입니다. 그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클리셰라는 단어를 안 쓸 때였는데, 듀나 작가님이 ‘클리셰 사전’이라는 섹션을 만들고 자신이 봤던 소설이나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들에 대한 내용을 쌓아나가고 계셨던 것 같아요.
클리셰는 “예전에는 독창적이었고 나름대로 진지한 의미를 지녔으나 지금은 생각 없이 반복되고 있는 생각이나 문구, 영화적 트릭, 그 밖의 기타 등등”이라고 표현하셨어요. 자기 생각 없이 반복한다는 게 클리셰의 특징이라는 내용도 있어요. 어떤 장르에서 법칙이나 규범처럼 반복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 반복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 장르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그 반복이 중요해질 때도 있는데요. 듀나 작가님은 ‘클리셰가 된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 없이 그냥 반복하는 데에서 이것이 장르의 전통인지 클리셰인지 구분한다’고 이야기하셨어요. 클리셰가 의미 없거나 재미없거나 진부하지만은 않다고도 이야기했어요. 진부함에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잖아요. 어떤 장르를 좋아한다는 건 그 장르에서 쓰이는 법칙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클리셰를 즐기는 방법 중에 하나이니까, 그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고 프롤로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클리셰들을 깨알 같이 모아놨어요. 듀나 작가가 1999년에 ‘듀게’를 만들었는데요. 그때는 클리셰이고 진부했던 것들 중에 지금은 아예 안 쓰고 있는 것들도 있고, 그때는 클리셰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들이 클리셰가 된 것도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20년 동안의 영화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되기도 하는 거예요. 그게 되게 놀라웠어요.
사전이지만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으면서 봤고요. 자신이 재밌어하는 부분을 따로 떼어서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듀나의 역사와 영화의 역사가 클리셰를 통해 보여지는 부분이 있었고요. 클리셰가 왜 쓰이는지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있었어요, 생각 없이 클리셰를 쓰는 것에 대해서 듀나 작가가 성토하는 부분도 있고, 그게 동감이 돼서 웃기기도 했어요.
톨콩(김하나)의 선택
『여름의 책』
토베 얀손 저/안미란 역 | 민음사
민음사의 ‘쏜살 문고 시리즈’가 있죠. 아주 작고 가벼운 책이 나오는 시리즈인데 『여름의 책』 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저희 친구들 사이에서 저명한 서평가인 ‘황사장’은 이 책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북구의 작은 섬에서 여름 한 철을 지나는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 단순한 일상의 단편들인데 하나하나 동화적 매력이 넘친다. 비유라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무뚝뚝한 문체이지만 본질적인 서정이 실리는 게 신기하다. 동작과 사색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제가 이 서평을 보고 집어든 책인데요.
일단 토베 얀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죠. 토베 얀손은 너무나 유명한 ‘무민 시리즈’의 작가잖아요. 핀란드 출신이고 1914년생이었습니다. 『여름의 책』 은 1972년에 나왔으니까, 토베 얀손이 58세 때 쓴 책이고요. 그때 이미 토베 얀손은 섬에서 살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즐거운 무민 가족』 시리즈의 책날개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모자 끝에서 장화 끝까지 삶의 기쁨이 넘치는 나라. 이 바다와 땅과 하늘 어딘가에는 괴짜는 괴짜대로 이해 받고, 겁쟁이는 겁쟁이대로 사랑 받고, 고집쟁이는 고집쟁이대로 존중 받고, 꼴찌는 꼴찌대로 위로 받고, 모두가 자유를 사랑하고, 모두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모두가 모두를 위하며 사는 작고 작은 생물들만의 세상이 있다.” 이런 생각이 토베 얀손의 삶에 대한 태도와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여름의 책』 이라는 제목도 좋은 게, 그냥 ‘여름 책’이에요. 소피아라고 하는 여자 아이와 할머니, 아버지가 섬에 있는 집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예요. 여름 한 철을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동작과 사색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너무 와 닿았어요. 이 책에는 도심에서 살 때는 잘 등장하지 않을 법한 동작 묘사들이 많이 나와요.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 힘든 할머니가 덩굴 밑이라든가 동굴 안을 기어가고, 뭔가를 찾아보면서 줍고, 물에서 헤엄을 치고, 이런 것들이 섬에 살고 있고 자연 속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도심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행위들이죠. 섬에 대한 풍광 묘사와 함께 그것을 읽고 있는 것 자체가 좋아요. 그리고 문체가 정말 무뚝뚝합니다. 그냥 동작을 묘사하고 거기에서 끝나 버리는데, 그게 너무 좋아요.
할머니는 사실 날이 많이 남지 않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지난해와 다름없는 여름 한 철을 잘 났고요. 약간의 모험도 있었고 하지만 담담하고 차분하게 한 계절이 저물어 가면서 할머니의 평온한 동작으로 끝이 납니다. 언젠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겠죠. 그리고 소피아는 자라나겠죠. 폭풍우는 또 치고, 섬은 마를 때도 있고, 또 꽃이 피겠죠. 이 순환감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 추운 날에 여름 책을 읽으니까 그것도 좋더라고요.
그냥의 선택
『내가 죽은 뒤에 네가 해야 할 일들』
수지 홉킨스 저/할리 베이트먼 그림/전하림 역 | f(에프)
딸과 엄마가 함께 만든 책이에요. 엄마 수지 홉킨스가 글을 쓰고, 딸 할리 베이트먼이 그림을 그린 에세이입니다. 부제는 ‘엄마가 딸에게 남기는 삶의 처방전’입니다. 이 가족들은 평소에도 죽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하지만 세세하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었나 봐요. 딸인 할리 베이트먼이 스물서너 살 무렵에 잠이 안 오던 밤에 이런 생각을 했대요. ‘언젠가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겠지.’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들어가 봤어요. 그랬더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감자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궁금하면, 그땐 누구한테 전화를 해 물어보아야 하지? 내가 일 얘기를 늘어놓으면, 누가 그걸 5분 이상 들어 주려 할까? 어떤 일이든 숨김없이 다 이야기해 줄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기꺼이 용서해 줄 사람이 또 있을까? 나를 세상에 내놓아 준 그 사람 없이, 나는 과연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다음날 엄마에게 부탁을 해요.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내가 하루하루 단계적으로 따를 수 있는 지침서를 하나 써달라고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 책입니다.
첫 장을 보면 “내가 죽는 그날은 아마도 이렇게 전개될 거야”라고 쓰여 있어요.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딸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써놓은 거예요. 그 뒤로도 딸에게 닥쳐올 상황들에 대한 지침이 이어지는데요. 조문객을 맞이해야 한다든지, 엄마가 돌아가셔서 모든 일상이 멈춘 것 같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반려견을 빗질해줘야 한다든지, 청소도 해야 하고, 부고도 써야 하고... 그런 많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날은 친구와 함께 심야 식당에 가서 밤새 수다를 떨어 보라고 조언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엄마가 정말 위트 있는 분이에요. 자신의 유품을 정리할 딸에게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애석하게도, 불륜이나 이중생활의 증거, 수백만 달러가 든 금고 열쇠 같은 건 없어. 정말이지 나에겐 비밀이 하나도 없었거든.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는 사실,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실망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 알아주렴.”
읽는 사람들을 울렸다가 웃겼다가 하는 책입니다. 그러다가도 눈물샘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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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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