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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 임대형 영화감독 “타인의 삶을 말하는 용기”

『윤희에게 시나리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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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관객에게 큰 위로가 된 영화 <윤희에게>의 시나리오집이 출간되었다. (2020.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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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관객에게 큰 위로가 된 영화 <윤희에게>의 시나리오집이 출간되었다. <윤희에게>는 한국 여성 ‘윤희’와 오타루에 사는 일본 여성 ‘쥰’의 사랑을 그린 로드무비다. 윤희는 20년 전 첫사랑 쥰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딸의 권유로 인생의 첫 단추를 다시 꿰기 위해 오타루로 향한다. 지금껏 주목받지 않았던 ‘퀴어 중년 여성’의 목소리를 담기까지 임대형 영화감독은 어떤 고민을 거쳤을까.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이후 2번째 장편영화를 완성한 임대형 감독과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한 시나리오의 디테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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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의식했다면 찍지 못했을 영화

 

감독님은 한때 문학을 좋아하셨다고요. 영화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특히 한국소설을 많이 읽으면서 자랐고요. 그러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좋은 대본들을 읽게 됐고 시나리오 작법 책으로 혼자 공부했죠. 큰 목표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고, 즐거운 것을 계속하다 보니 영화의 길로 들어서게 됐어요.

 

시나리오집은 누구의 기획이었나요?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하셨고, 제작사 대표님이 책으로 내길 원했어요. 대본을 오랜 기간 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았던 대본인데 대표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봐요. 출판사에서 초판 한정부록으로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의 편지를 각각 한국 종이와 일본 종이로 만들어주셨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해오셨어요. 어쩌면 ‘중년 퀴어 여성’의 이야기는 감독님에게 타인의 것이기도 해요.


처음에는 극단적인 조심성이 있었어요. 이 상황에서 인물이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까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매번 고민했죠. 어느 순간 감독으로서 조심하는 태도도 필요하지만, 너무 다가가지 않으면 찍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에둘러 가기만 하면 정작 하려는 이야기를 못 하니까요. 조심스럽게 접근하되 단호하게 할 이야기는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었어요. 스스로에게는 모순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죠. <윤희에게>는 너무 많은 시선을 의식하면 찍을 수 없는 영화였어요.

 

이중적인 태도가 영화에도 반영되었나요?


<윤희에게>는 당사자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어디 둘 것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아예 밀착해서 인물의 시점에서 찍을까 아니면 거리를 두고 인물을 가만히 지켜보게 할까.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결국, 신마다 달리 접근했어요. 윤희의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면 카메라가 흔들리면서 따라가고, 어떤 순간에는 거리를 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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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윤희에게>에서 ‘편지’는 윤희와 쥰의 마음을 전달하는 중요한 장치인데요. 시나리오를 영화로 옮기면서 내용이 달라졌어요. 시나리오에는 인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있었다면, 영화에서는 절제된 느낌이 들어요.


현장에서는 시나리오대로 녹음했었어요. 그런데 긴 호흡의 영화를 편집하다 보니 새로운 리듬에 맞게 편지를 짧게 줄여야 했죠. 원래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나 되짚으면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윤희와 쥰이라면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덜 직접적으로 쓸 것 같아서 함축적으로 고쳤어요. 완성 직전까지 윤희의 편지를 두 버전으로 녹음해놓고 고민했죠. 최종 결정한 내레이션은 윤희의 내레이션이 쥰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는 것이 더 명확해졌어요. 쥰이 “나는 너에게 도망쳤던 거야” 하고 쓰면, 윤희는 “나도 너처럼 도망쳤던 거야” 하고 대답하죠.

 

시나리오에 두 번 이상 반복되는 대사가 많아요. 오타루에서 쥰과 함께 살아가는 ‘마사코 고모’가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하면, 나중에 쥰이 그 대사를 똑같이 말하는 것처럼요.


한 인물의 대사를 다른 인물이 반복하게 해서, 한국의 윤희 가족과 일본의 쥰 가족이 비슷하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두 가족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같은 문화권이니 느끼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특히 윤희와 쥰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적인 차별과 혐오의 공기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고, 딸 새봄(김소혜)과 마사코 고모(키노 하나)는 그 삶을 곁에서 지켜봐 왔을 거예요. 이렇게 인물들의 유사성을 강조해서, 관객분들이 인물의 삶에 깔린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비슷하다고 느끼셨으면 했어요. 또, 제가 개인적으로 대사들이 반복되는 걸 좋아하는데 반복하면서 차이가 있지만 관객분들에게 상기시키고 어떤 부분에서는 반복을 한다는 것만으로 유머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퀴어 로맨스 영화 <캐롤>과 달리, 직접적인 성애 장면이 없어요.


너무 넣고 싶었어요. 실제로 호텔 바에서 만난 쥰과 료코(타키우치 쿠미)가 그 이상으로 발전하거나, 윤희와 쥰의 키스신이 들어간 버전도 있었어요. 영화에서 쥰에게 마사코 고모가 무슨 꿈을 꿨냐고 물으면 “그냥 같이 있었어” 하는데, 꿈에서 쥰이 어린 윤희의 형체를 보는 버전도 있었고요. 그러나 영화를 찍어나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물론 사랑하는 관계라면 성애도 나누겠지만, 윤희와 쥰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같이 있는 순간을 가장 원하지 않았을까요? 아직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아서 제 생각이 조금 어렸구나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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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와 딸 ‘새봄’의 모녀 관계가 특별해요. 새봄은 윤희에게 온 편지를 읽고 엄마의 첫사랑을 도와주려고 하죠.


윤희와 새봄의 모녀 관계는 제가 어머니와 동생을 관찰한 것을 반영했어요.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어떻게 딸이 편지를 받고 엄마의 연애를 도와주려 하냐고요. (웃음) 누군가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는 제가 보고 싶었던 모녀 관계를 그리고 싶었어요.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새봄도 딸의 역할로만 한정되지 않는 인물이에요. 영화에서는 편집되었지만, 시나리오에는 새봄이 혼자 우는 장면도 있고요.


새봄의 디테일도 편집 과정에서 많이 생략되었죠. 새봄이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모습도 시나리오에는 담으려 했어요. 비범한 친구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어떤 성적 지향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새봄이 엄마에게 온 편지를 읽고 자기혐오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의 첫사랑을 알았을 때, 혹시 자신이 엄마의 삶에 방해가 되어온 건 아닌가,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을 거예요. 그 생각을 엄마에 대한 증오로 표출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쏘게 된 거죠. 그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 것 같지는 않아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우는 장면을 넣었어요.

 

김소혜 배우는 그 전사를 다 숙지하고 연기를 했나요?


네, 대본을 성실하게 분석해서 현장에 오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들어왔어요. 저도 새봄이 우는 신을 좋아하는데, 김소혜 배우가 연기를 정말 잘했거든요. 새봄이 슬퍼서 운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화나서 우는 것 같은 그런 미묘한 감정을 다 표현하더라고요. 현장에서 김소혜 배우는 새봄 그 자체가 됐어요. 촬영 동안에는 생각과 말을 새봄처럼 하고 “새봄이라면 이러지 않을까요” 하고. 상당히 캐릭터와 밀착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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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간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에 윤희의 공간인 지방 도시와 쥰의 공간인 오타루가 나오죠. 두 공간이 대비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방 도시는 윤희가 오랫동안 갇혀 지낸 공간이라 활기가 느껴지지 않도록 원색을 배제하고 무채색으로 한정했어요. 대신 오타루에서는 의상, 소품에 색을 많이 사용해서 두 공간을 대조시키려 했어요. 오타루가 상대적으로 너무 예뻐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촬영 감독님이 두 공간을 다르게 연출하되 어느 한쪽이 미적으로 보이지 않게 균형을 잘 잡은 것 같아요. 오히려 일본 스태프들은 한국의 공간이 신선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윤희에게>는 ‘취향’에 대한 영화이기도 해요. 윤희와 새봄은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고, 마사코 고모는 SF소설을 읽는 할머니죠.


주변에 하나에 몰두해서 삶을 즐기는 ‘덕후’ 친구들이 많아요. 무언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윤희가 필름 카메라, 그중에서도 코닥을 좋아하는 것처럼요. 세세한 자기만의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재미있어 영화에 자주 등장시키는 것 같아요. 반대로, 뭘 싫어하는지 보면, 서로 같은 사람이구나 알아볼 수 있죠. 좋아하는 건 세세하게 다를 수 있는데 싫어하는 건 정말 비슷하더라고요. 쥰과 마사코 고모가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과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하는 것처럼요.

 

결국, <윤희에게>는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이야기 같아요.


이 영화의 인물들이 처음부터 비슷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서로 사랑하다 보면, 배우려고 하고 닮아가는 것 같아요. 말도 비슷하게 하고 좋아하는 것도 비슷해지고. 물론 ‘나’와 ‘너’라는 경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사랑하다 보면 ‘내’가 마치 ‘너’ 같은 상태가 되잖아요. 저도 그런 경험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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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윤희와 쥰은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첫사랑의 사진을 사진첩에 넣어 두고, 고장 난 필름 카메라도 보관하죠. 다음 세대인 새봄과 경수는 그걸 잘 고쳐서 ‘간직하는 사람’ 같고요.


물건이든 사람이든 과거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저 과거가 현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요즘 이전 세대를 혐오와 경멸의 시선으로 보곤 하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도 언젠가 나이가 들 텐데, 그때 젊은 세대가 저를 혐오한다면 무서울 것 같아요. 존경할만한 부분이 있다면 조명하고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 먼저 이 영화를 전하고 싶은 사람은요?


이 영화의 핵심은 ‘퀴어’이기 때문에, 당사자인 퀴어분들이 재밌게 봤다고 할 때, 기분이 가장 좋죠. 당사자를 만족시키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퀴어의 이야기인데 그분들이 영화를 별로라고 하면 그게 가장 상처가 될 것 같아요. 퀴어분들이 연애를 시작할 때, ‘이 영화 보러 가자’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럴 때, 이런 이야기가 너무 늦게 나왔구나 싶죠.

 

 

 


 

 

윤희에게 시나리오임대형 저 | 클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간 장면까지 모두 담긴 무삭제 시나리오와 영화 속 윤희와 쥰이 주고받은 편지가 시나리오 뒤에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와 비교하며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문학적으로 쓰인 시나리오에 오롯이 집중해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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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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