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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42화 :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여자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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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평양을 거쳐 경성으로 와서 카페의 여급으로 일했던 것은 조직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한여옥은 태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던한 기생이나 다름없는 카페 여급 일을 능숙하게 치러냈다. (2019.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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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여옥은 그이를 다시 뵐까 하여 전등을 끄고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 보았다. 처서가 가까운 여름날 밤의 선선한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올 뿐이었다. 여옥은 한 시간쯤 그렇게 어둠 속에 앉아서 여러 지난 일들을 생각했다. 십 년 세월이 책갈피 넘어가듯 차례로 어둠 속을 스쳐 지나갔다.

 

통영의 선창이 내다보이는 바닷가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원래 기역자 한옥과 마당이 넓은 집이었고 여러 해 자라난 감나무 네 그루가 담장 가에 서있었다. 선대도 한의원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도 가업을 물려받았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바닷길을 잇는 배가 많아지면서 고깃배만 드나들던 선창이 연락선과 화물선으로 점점 커지고 항구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한의원도 번창했다. 여옥의 아버지는 마당에 신식 이층 건물을 짓고 인근 섬과 지방의 환자들을 받았다. 이층은 침을 놓고 치료를 받는 방이 여럿이고 아래는 주로 약초를 들이고 내는 약방과 손님 대기실로 썼다. 그녀가 심부름이라도 가보면 대기실에는 늘 대여섯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환자 대기실과 따로 떨어진 약방은 아버지의 지인들이 놀러 와서 아버지와 환담을 나누는 장소였다. 아버지는 곰방대 물고 안쪽에 병풍을 등지고 앉았으며 그 뒤에서 의원 조수가 약초를 썰거나 조제를 했다. 방안에는 교자상이 놓였고 그 주위에 방석을 깔고 손님들이 둘러앉아서 때로는 바둑도 두고 차도 마시고 점심에는 부두의 식당에서 배달해 온 면상을 받기도 했다.

 

여옥이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은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여옥은 부산의 여고보에 진학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당시의 지방 유지들이 다들 그러했던 것처럼 여자가 많이 배우면 공연히 팔자나 사납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가사를 돕다가 가세가 밥술깨나 먹는 그러루한 집안의 남아를 만나 조용히 시집가면 그게 여자에게는 가장 평안한 일생이 되리라고 아버지는 굳게 믿고 있었다. 더구나 매일 그를 둘러싸고 놀러 다니는 항구의 유지들도 거의 생각이 일치했고 저마다 추천하는 신랑감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터였다. 신금이네처럼 한여옥도 어머니에게 늘 자신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경을 호소했고 모녀가 늘 안방에서 종일 함께 지냈으므로 어머니도 딸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다. 여옥이 바깥출입을 할 데라고는 천주교회당뿐이었는데 그녀는 거기서 외국인 신부와 수녀를 만나 사진과 책으로 개화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집을 탈출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친구 중에 배를 서너 척 가진 선주가 있더니, 그 집 아들이 부산에서 고보를 졸업하고 집에 돌아왔고 그들 아버지들은 두 남녀가 혼기에 이르렀으며 서로가 맞춤한 배필이라고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여옥은 결혼을 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통영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더구나 그 남학생이 반바지 위에 유카타를 헐렁하게 걸치고 입에는 권련을 물고 게다짝을 끌며 지나가는 걸 본 후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 꼴에 머리 위에는 흰줄 친 학생모를 비뚜름하게 쓰고 있었다. 그게 어느 댁 아들인지도 부두에서는 다들 알아보게 되어 있었으니까. 선을 보는 자리에서 여옥은 그 철딱서니를 다시 보게 되었고 넌더리가 나버렸다. 청요릿집에서 양가 부모가 만나 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녀석이 마주앉아서 여옥을 향하여 계속 바보처럼 웃어대질 않나 심지어는 요리상 아래로 발을 뻗어 그녀의 무릎을 발가락으로 더듬기까지 했던 것이다.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당황한 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한여옥은 당장 집에서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저도 같이 눈물바람으로 하소연한 여옥은 엄마의 비상금을 받아 부산 가는 새벽 연락선을 탔고 그동안 알아두었던 동경의 외삼촌이 머물던 하숙집을 목표로 정하였다.

 

한여옥보다 불과 네 살 연상이었던 외삼촌은 조선에서 고보를 나와 일본에 가서 이년의 예과 과정을 거쳐서 대학에 진학해 있었다. 물론 외가도 마산에서 살만한 집안이었고 여옥의 아버지도 처남에게 가끔씩 학비 보조를 해주던 터였다. 여옥이 편지를 두어 번 삼촌에게 보낸 적도 있어서 그는 조카의 동경 출현에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뒤이어 누나의 근심에 가득한 당부 편지가 날아왔기 때문에 그는 책임감을 더더욱 갖게 되었다.

 

여옥은 독립심이 강한 여자였고 집에서 엄마가 부쳐주는 하숙비와 학비 중에서 적어도 학비만은 자기가 일하여 보태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삼촌은 자신이 예과 시절에 일하던 신문 보급소의 배달 일을 주선해 주었고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신문배달을 다녔다. 배달부 중에는 학생들이 많았고 그중에 많은 숫자가 조선에서 건너온 젊은이들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동년배들에게서 사회주의 모임에 관하여 듣게 되었고 일 년이 못 가서 공산당 일본총국 산하의 고려공청 조직에 들게 되었다. 그때에 책 읽고 먹물깨나 들었다는 유학생치고 사회주의 모르면 무식쟁이 취급을 받던 때여서 여옥은 모래가 물 빨아들이듯 신사상에 대하여 재빠르게 흡수했다. 조선에서도 좌익 서적들이 버젓이 감옥에 들어가던 시절이어서 이른바 내지라는 일본에서는 혁명적인 서적들이 원전은 물론이고 일본 학자들의 해설서까지 신간으로 무수히 출판되고 있었다. 그녀가 학업을 그만둔 것이 명목상으로는 학비 조달이 어려워졌다고 했지만 사실은 고려공청에 검거 선풍이 몰아 닥치면서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검거 또는 퇴학당했고 그녀도 수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신금이는 말하곤 했었다.

 

 “장산이 에미가 나에게만 그 얘기를 해주었단다. 그건 연애도 사랑도 아닌 급박했던 시기에 지푸라기를 잡아보려던 것이었다구. 지네 삼촌 다니던 대학의 동급생 중에 군산서 왔다는 대지주의 아들이 있었는데 학생들 모임에 큰돈을 내주곤 했다지. 일종의 혁명 지원자 같은 모쁘르 행세를 했다는 게야. 그 사람이 오랫동안 여옥이를 좋아했다는구나. 마침 그가 귀국하려던 참에 이국 땅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원하게 되어서 그에게는 행운이었던 게지. 장산이 에미는 처녀의 몸으로 그 사람을 따라서 일단 시모노세키로 가서 여객선을 타지 않고 후쿠오카로 나아가 화물선을 야미로 타고 목포항에 닿았다지.”

 

그러고는 한여옥은 그의 부모도 만나지 못한 채 군산에서 집을 장만하여 살림을 차렸다는데 일 년쯤 살고 나서야 그가 처자식이 있는 기혼자라는 걸 알게 된다. 고보 시절에 이미 집안의 권유로 장가를 들게 되었고 아내는 아들까지 낳았으며 그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갓 스무 살의 그녀는 남편과 다투지 않고 냉정하게 담판하여 그가 쥐어주는 위자료를 받아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던 것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철이 형수인 신금이에게 몇 가지 일화를 이야기 해준 바에 의하면 그녀는 상해를 거쳐서 만주로 갔고 이전 일본 유학 시절의 공청 경력이 도움이 되어 만주의 프로핀테른 조직에 소속된 듯하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조선 청년 윤봉길이 상해의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히라가와 대장등 다수의 장교들을 폭사 시킨 사건이 일어나면서 아마도 그녀는 국내로 들어오게 되었을 터였다. 마침 국제당 극동부의 일국일당주의 정책도 그녀와 같은 고려공청 조직원들의 국내 진입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녀가 평양을 거쳐 경성으로 와서 카페의 여급으로 일했던 것은 조직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한여옥은 태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던한 기생이나 다름없는 카페 여급 일을 능숙하게 치러냈다. 그녀는 술도 마셨고 손님들과 담화도 나누었지만 별다른 춘사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여옥은 그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말라죽은 나무 같은 여자였을까. 신금이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을 받을 겨를이 없었던’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금이 할머니는 아들 이지산과 손자 이진오에게까지 늘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시절에 가엾은 여자가 어디 한 둘이라야 말이지.”

 

한여옥은 어둠 속에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났고 뒷마당으로 나가 함지에 물을 가득히 채워 목욕을 했다. 찬물이 머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아랫배와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목욕을 하고는 방안에 이부자리를 붙여서 깔고 누웠다. 베개도 나란히 붙여 두었다. 까무룩하게 잠들 무렵인데 기척이 들리고 점포의 유리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모임을 끝내고 돌아온 이철이 바깥방의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조용했다. 그가 발걸음을 죽여 안으로 들어오는 문을 열고 부엌에 서서 안방 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는 기척도 느껴졌다.

 

 “이부자리가 여기 있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여옥은 누운 채로 졸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자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이철이 들어와 문 앞에 앉았다. 한여옥은 가만히 누워서 기다렸고 이철이 망설이다가 옷을 벗고 속옷 바람이 되어 그녀의 옆에 누웠다. 여옥은 몸을 돌려 그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려 안았다. 그날 밤에 장산이가 그녀의 몸에 깃들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무렵에 몇 달이 지나서 그녀는 임신을 했다고 막음이 고모와 신금이에게 귓속말을 해주었다. 이철의 형 일철의 아들 이름을 큰할아버지 이백만의 고향인 강화 지산리에서 따다가 이지산이라 지었지만, 그것도 돌림자라고 산을 따서 여옥의 고향 부근 산 이름을 따서 길 장에 멧 산 자, 장산이라고 지었다. 물론 그것은 그 다음 해의 일이었고 막음이 고모와 신금이의 보호 아래 태어난 장산이는 아버지 없이 태어나게 된다. 그때쯤에는 이이철이 검거되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고 그가 나올 무렵에는 명이 짧아 또 다시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일철은 그날 화물차를 타고 부산을 왕복했고 용산역에서 퇴근길에 경인선을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다. 아마 추석 무렵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김군과 함께 고기 몇 근을 샀고 기관수 야마구치와 차떼기하면서 구포 배를 한 상자씩 나누어 받았던 것이다. 그는 건장한 어깨에 배 상자를 짊어지고 한 손에는 고기를 싸서 묶은 노끈을 쥐고 역 앞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를 지나쳐 가던 어떤 사내가 멈칫 서더니 일철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오이 거기 이일철 아닌가?”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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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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