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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주인들
<푸른 사자 와니니를 찾아 떠난 아프리카 여행기> 3편
한순간, 바람에 풀잎이 달싹이는 그 찰나의 선택에 생과 사가 달라지는 때였다. 풀숲을 쏘아보는 치타의 눈길 안에 임팔라와 톰슨가젤들이 있었다. (2019. 08. 20)
모두 한자리에
세렝게티에는 두 계절이 있다. 우기와 건기가 번갈아 찾아들고 초원은 그에 따라 푸르게 피어났다, 누렇게 시들어간다. 그때가 되면 세렝게티에서는 가히 이주(Migration)라 부를 만한 대이동이 시작된다. 최대 200만 마리의 누와 얼룩말이 비구름을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 너머 마사이마라 국립 공원까지 무려 100km의 대이동에 나선다.
인간의 역사로는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으로 꼽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들 수 있을 텐데, 일단 그 규모의 면에서 세렝게티의 대이동에 견줄 바가 못 된다. 모험의 정도로 보아도, 그 결과로 보아도 그렇다. 악어 떼가 득시글대는 마라강을 맨몸으로 건너야 하는 험난한 원정, 그 길에서 그해 태어난 누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는다. 세렝게티에 남겨진 초식 동물들의 시련도 원정에 못지않다. 버펄로는 물론, 코끼리와 기린도 사자 무리의 공격을 받는다. 그렇게 치열하게 삶과 다투는 사자들도 건기에 태어난 새끼의 90%를 잃는다. 아기 사자들이 굶어서 죽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세렝게티를 찾은 것은 12월 1일, 소우기에 접어든 때였다. 마침내 누와 얼룩말이 초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세렝게티의 첫인상은 황량했다. 물기라곤 찾아볼 길 없이 바싹 마른 땅에 먼지만 부옇게 피어올랐다. 그 땅에서 헤매듯 띄엄띄엄 홀로 돌아다니는 임팔라나 톰슨가젤은 동족에게 유배당한 족속들 같았다. 임팔라는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마초적인 습성을 가졌다. 최고의 지위에 오른 단 한 마리의 수컷이 무리를 독차지한다. 그렇다면 변방을 떠도는 임팔라 수컷은 말 그대로 유배당한 처지나 다름없겠다. 톰슨가젤은 암수 모두 뿔이 있어서 한눈에 분간하긴 어렵다. 아무튼 가젤이란 본래 수십 마리씩 무리 지어 다니며 풀을 뜯고 사는데, 동족과 헤어져 마른 땅을 헤매는 데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남다른 생존 방식을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물이 부족해 풀이 드문 만큼 초식 동물이 드물고, 그런 만큼 맹수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대신, 사냥감이 될 확률도 낮을 것이다. 쫓기더라도 풍요로울 것이냐, 굶주릴지언정 자유로울 것이냐.
와니니라면 후자를 택할 것 같았다. 비록 척박하더라도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곳, 힘껏 포효할 수 있는 곳. 와니니는 그런 곳으로 무리를 이끌었을 것 같았다. 와니니는 그렇게 다음 이야기 『푸른 사자 와니니 2: 검은 땅의 주인』에서 바로 그 황량한 땅을 달리게 되었다. 그곳을 지나 리조트들이 모여 있는 지역, 세렝게티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초원은 푸르렀다. 눈 돌리는 곳마다 풀숲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고, 무리 지은 동물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돌아다녔다.
버펄로가 온다
버펄로의 속도는 지구보다 느린 듯했다. 검은 강물이 흐르듯 묵직한 속도로 초원을 가로지른 버펄로는 일단 걸음을 멈추면 그대로 바위가 되어 버리는 듯했다. 사파리 자동차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 혹시 관광객을 배려하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어깨높이만도 3m에 달하는 기린은 한눈에 보기에도 장관인 데다, 그 뛰는 모습도 독특하다. 앞발과 뒷발을 캉캉 부딪치며 뛰는 동작은 깜찍하기까지 한데, 그 속도는 바람을 가르고도 남는다.
혹멧돼지들은 부조리한 세상에 불만을 가진 철학자처럼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바삐 돌아다녔다. 물론 바쁘대야 마음뿐, 혹멧돼지의 열 걸음 아니, 스무 걸음이래야 기린의 한걸음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임팔라도, 가젤도, 키가 60cm밖에 되지 않는 딕딕도, 딴생각에 빠진 듯한 박자 늦게 움직이는 얼룩말도, 물 한 모금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하는 겁 많은 누도, 그리고 태초의 비밀을 간직한 채 과묵한 순례를 이어 가는 듯한 코끼리들도, 비구름과 함께 풀밭의 주인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만큼 사냥하는 동물들도 분주해졌다. 세렝게티 국립 공원은 관리가 엄격한 곳이라서 다큐멘터리 제작팀도 야간 촬영을 허락받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관광객들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낮의 세렝게티일 뿐, 야행성인 맹수들의 활약을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다행히 세렝게티의 포식자들은 굳이 인간의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훤한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곤히 잠든 하이에나
밤새 만족스럽게 배를 불린 듯한 하이에나 무리는 아카시아 덤불 아래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자동차가 바로 곁으로 다가가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어린 하이에나만 흘깃 보았다가 금세 심드렁해져서 도로 잠을 청했다. 사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인간의 등장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사파리 자동차가 근처에 멈춰 서면 사자들은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자동차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인간의 자동차 따위, 사자에게는 그저 만만한 그늘인 것이다.
세렝게티의 동물들은 대체로 사파리 자동차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주 보아서 익숙해진 듯했다. 초식 동물들은 사파리 자동차를 유심히 쳐다보기도 하지만,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코끼리야 사자 못지않게 인간의 자동차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 어떤 동물도 인간의 자동차에 굳이 가까이 다가와 그 그늘에서 쉬어 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직 사자만의 여유, 세렝게티 국립 공원 최상위 포식자만의 여유인 듯했다.
그렇게 사냥터가 조용해진 한낮, 치타는 그제야 마음 놓고 사냥에 나섰다. 유난히 풀이 높게 자란 곳이었다. 그 치타를 보는 순간, 사냥의 시간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도시의 인간마저 직감할 만큼 온 풀숲이 긴장하고 있었다. 웃자란 풀잎들이 바람에 몸을 떠는 가운데, 그곳에 선 모든 동물은 생과 사의 경계에 있었다. 비유가 아니었다. 한순간, 바람에 풀잎이 달싹이는 그 찰나의 선택에 생과 사가 달라지는 때였다. 풀숲을 쏘아보는 치타의 눈길 안에 임팔라와 톰슨가젤들이 있었다. 치타도, 치타의 눈길에 사로잡힌 듯 꼼짝 않고 서 있는 임팔라와 가젤들도, 지켜보는 인간들조차 숨죽인 채 긴장하고 있었다.
엄마는 마음이 바쁜데
그런데 천진한 발소리가 풀숲을 흔들었다. 아기 치타들이었다. 아직 머리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치타 세 마리가 엄마에게 달려왔다. 잠자코 기다리라는 엄마의 당부가 있었을 텐데, 아직 어린 치타들이 긴장감을 견뎌 내지 못한 게 아닐까. 아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엄마 치타는 바로 사냥을 포기했다. 아기 치타는 아직 맹수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처지가 못 된다. 사자나 하이에나는 물론, 자칼이나 사바나 고양이에게도 만만한 상대에 불과하다. 배가 홀쭉한 엄마 치타는 사냥을 포기한 채 아기들을 데리고 인간의 길을 따라 초원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엄마 치타는 사냥에 성공했을까? 아기들을 무사히 지켜 냈을까?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다. 치타 가족에게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밤, 그건 사자의 시간이었다. 리조트 방안까지도 사자의 울음이 들려왔다. 으아오― 으아오― 영역을 주장하는 사자들의 울음이었다. 사자 무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평화로운 안식의 노래일 것이다. 그것은 초원의 주인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인지도 몰랐다. 관광객도, 가이드도, 국립 공원을 지키는 레인저들마저 인간의 지붕 아래로 숨어드는 시간, 초원의 진정한 주인들이 소리 높여 우는 시간이었다.
푸른 사자 와니니이현 글/오윤화 그림 | 창비
무리를 위해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마디바와 부족한 힘이나마 한데 모아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와니니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함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한다.
관련태그: 푸른 사자 와니니, 아프리카, 초원, 임팔라
1970년 부산 출생으로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어쨌거나 내일은 오늘보다 멋질 거라 믿으며, 동화 『짜장면 불어요!』, 『장수 만세!』, 『오늘의 날씨는』, 『로봇의 별』, 『마음대로봇』, 『나는 비단길로 간다』 등을 썼다. 제13회 전태일 문학상과 제10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창작 부문 대상, 제2회 창원 아동 문학상을 받았다.
<이현> 글/<오윤화> 그림10,800원(10% + 5%)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해!” ‘함께’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무리를 위해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마디바와 부족한 힘이나마 한데 모아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와니니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함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하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