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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도 모른단다

아이들은 자기 생김대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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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그냥 말하지 않아야겠다. 비밀이니까. 저녁의 나무들 발치에나 털어 놓아야지. (2019. 06. 27)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여름 저녁의 나무들은 비밀스럽다. 인적이 드문 곳에 서있는 나무들은 더 그렇다. 이파리는 더 이상 초록빛이 아니다.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된 사람이 짓는 풀어진 낯빛, 홀가분한 어둑함에 가깝다. 상상 속에서, 저녁의 나무들에게 묻는다. 너네, 원래 짐승이었지? 해가 있는 동안만 식물인 척 한 거지?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비밀들을 잡아먹고, 어두워질 거지?

 

문득.


저녁의 나무들 발치에다 비밀을 하나 흘리고 싶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정속독 학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빠르고 정확한 독서를 돕는 게 내 일이었다. 한때 속독학원은 꽤 유행이었고, 자기들만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학원의 교육시스템을 며칠 간 익힌 후,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하면 아이들은 3분가량 명상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 나는 3분씩 초시계를 끊어 아이들이 책을 읽는 시간을 재주고, 페이지를 기록하게 해야 한다. 일정 분량을 읽은 아이는 내용을 요약하고, 끝까지 다 읽으면 독후감을 쓰게 해야 한다, 책 이해도를 묻는 퀴즈를 풀게 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아이들이 척척 따라와 줘야 한다.
 
계획과 규칙은 이러했는데, 지켜질 리 없었다. 나는 저학년 아이들 담당이었다. 교실은 자주 난장판이 됐다. “준비, 시작!” 내 외침과 초시계 작동은 아무 위력이 없었다. 아이들은 딴 짓을 하고, 책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항의하고, 책을 떨어뜨리고, 단어의 뜻을 모르겠다고 소리치고, 코를 파고, 친구와 싸우고, 지우개를 떨어뜨리고, 연필을 부러뜨리고, 일어나서 걸어 다니고, 쓸 데 없는 질문을 하고, 졸다가… 가끔 책을 읽었다. ‘드물게’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도, 읽기에 집중한 나머지 내가 요약을 권하면 하기 싫다고 반항했다. 그냥 이어서 읽고 싶다는 거다.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던 꼬맹이가 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아이들이다.

 

S는 한글은 익혔으나 ‘읽기’가 안 되는 1학년이었다. 10초에 한번, 특이한 소리를 내는 틱 장애를 갖고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아 한 음절씩,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책을 읽어줬다.  고백하건대, 설리반 선생님처럼 인내심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S는 집중력이 없었다. 어느 날은 단어 몇 개, 어느 날은 한 두 문장만 겨우 읽고 돌아가기도 했다(속독학원에서!). S 때문에 학원을 관둘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고단했다. 그러나 S는 믿을 수 없이 느린 속도로, 성장했다. 나와 한 단어씩 서로 교차해 읽어보는 게임을 하다, 익숙해지니 한 문장씩 교차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두 문장, 세 문장을 이어서 읽었다. S가 ‘한 문단’을 혼자 읽는 데 성공한 날, 우리 둘은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S는 혼자 한쪽을 읽더니, 다음 쪽도, 그 다음 쪽도 이어서 읽었다. 결국 짧은 그림책 한 권을 혼자 다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 반년도 넘게 걸렸다. 그 애는 책에 집중한 나머지 점점 나를 찾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S에게는 초시계 재기, 요약, 독후감 쓰기… 어떤 것도 시키지 않았다.

 

H는 느려도 너무 느린 아이였다. 커다란 얼굴에 이목구비가 아주 작은, 나무늘보가 연상되는 아이였다. 고도비만이라 앉으면 배가 책상에 닿는 2학년 남자아이. H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순했다. 느린 것 빼면 나쁜 게 하나도 없는, 천사 같은 성정을 가졌다. 솔직히 H는 그 학원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였다. “이래서야 오늘밤 안에 느낀 점을 다 쓸 수 있겠어(두 줄만 쓰라고 했다)?” 핀잔을 줬지만, 나는 그 애를 사랑했다. 느리고, 느려서, 느림에도 좋았다. 그 애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누구보다 책을 ‘정확히’ 읽어냈다.

 

아이들은 자기 생김대로 책을 읽었다. 내 수업에서 ‘속독’은 꿈도 못 꾸니, 학원 정책과는 맞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느린 독서, 느린 발전은 가능했다. 사실 읽는 데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책과 포개져, 하나로 흘러가는 일. 독서의 맛을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때 만난 아이들은 성년이 되었을 거다. 잘 지낼까? 만난다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책 앞에서 흔들바위처럼 몸을 흔들어대던, ‘읽기’가 더뎌서 내 속을 태우던 S야. 하품이 나올 정도로 모든 동작이 느리던 H야. 어떻게 지내니? 사실 그 반에서 가장 느리게 책을 읽는 사람은 나였을지도 몰라. 속독 같은 거, 선생님도 못해. 선생님도 모른단다. 게다가 아직도 책을 얼마나 느리게 읽는지… 읽는 속도는 앞으로도 빨라지지 않을 것 같구나.

 

가만, 그냥 말하지 않아야겠다. 비밀이니까. 저녁의 나무들 발치에나 털어 놓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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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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