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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23화 : 당신 책임져야 해!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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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이는 그날 방직공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계획되었던 게 아니라 우연히 일어났다고 했다. 손영순이 기계를 조수들에게 맡기고 공장 밖으로 뛰어 나갔고 감독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쫓아 나갔다. (2019.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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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이철은 국밥 한 그릇을 시켜놓고 앉아서 지난번 그 사내를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는데 도무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복장을 바꾸고 나타난다면 몰라볼 것만 같았다. 여섯 시 조금 넘어서 작업복 차림에 헌 벙거지를 눌러쓴 사람이 들어서더니 출입구 근처에 앉은 이철에게 와서 털썩 앉았다. 그가 국밥을 주문하고 나서 이철에게 웃어 보였다. 


 “얼른 요기하구 나갑시다.”


이철은 그가 지난번 그 사람이 맞다고 생각했다. 우선 음성이 낯익었고 웃을 때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던 얼굴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 형이 열심히 사업하구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예? 누가요……”


하다가 이철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묻는 일은 쓸데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국밥만 열심히 먹고는 저물고 있는 거리로 나섰다. 이철은 진행하고 있는 독서회에 대해서 얘기했고 사내는 가끔씩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들은 청엽정 부근의 숲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벙거지 사내가 말했다. 


 “너무 급하면 체하기 마련이우. 지금 만든 독서회를 잘 유지하면서 파업이나 쟁의는 되도록 많은 직원이 참여할 만큼 무르익었을 때에 일으켜야 합니다. 절대로 혁명적인 내용이나 말로 근로대중에게 들이대서는 안 될 거예요. 생활과 밀접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언덕에 오르니 주변에 주택가의 불 켜진 창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들은 언덕의 오솔길을 통하여 내리막길 끝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숲에는 인적이 끊겨서 조용하고 발밑에 수북하게 쌓이기 시작한 낙엽 밟는 소리만 들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나더니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벙거지가 이철을 툭 치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앉았다가 갑시다.”


이철이 그를 따라서 엉거주춤하게 앉았고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서슴지 않고 그들의 곁에 와서 앉았다. 벙거지는 아마도 그와 이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인력거꾼의 유카타를 걸치고 있었다. 그가 이철에게 말했다.


 “안대길 형에게서 이 형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류씨라구 합니다.”


이이철은 공책에서 그의 성이 적힌 연필 글씨를 본적이 있었다. 


 “영등포에서 여러 가지로 수고가 많다지요?”


이이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야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이형처럼 첫 걸음마를 떼고 있지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 긴요한 점만 짚어 보십시다. 활동가와 대중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며 누구는 항상 앞장서고 또 누구는 따라가기만 하는 일도 없어져야 합니다. 개인과 대중이 의식화되면 서로에게서 배우게 되지요. 대중없는 당은 머릿속의 관념일 뿐이겠지요. 일제의 폭압이 심해질수록 좌편향이 되기 마련인데요, 그럴수록 우리는 침착해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되 너그러워야 하고 감출 것은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근로대중의 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말이나 행동도 경계해야 되겠지요.”


이이철은 못내 궁금하던 점을 물었다.


 “독립운동과 계급운동은 다른 일인가요?”


 “나에게도 그게 항상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무거운 철쇄에 묶여 있어요. 일제의 식민 억압과 부르주아 사회체제입니다. 근로대중의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일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 두 과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독서회의 구성원에 대하여도 토론했고 다른 공장과의 연락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접촉은 범위와 인원을 최소화하고 각 일터의 사정에 맡겨서 사업을 해나가야겠죠. 이형이 했던 방식으로 다른 일터에서도 점차적으로 조직 범위를 넓혀 가면 되겠군요.”


그날 이철이 뇌리에 새긴 것은 서두르지 말되 급변하는 상황을 놓쳐서도 안 된다는 것과 노동대중의 자율성과 지도력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활동가는 대중을 도우면서 끊임없이 대중의 지도를 받는 존재라야 했다. 청엽정 언덕에서 만났던 류 씨를 이철은 그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이이철은 그가 준 필사본 책자 몇 권을 오래 간직했다. 그것들은 때로는 매우 이론적이고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류가 직접 필기한 것들은 대개가 구체적인 내용들이었다.

 

거리에서 주의사항


도보의 경우, 큰 물건 예를 들면 책 등을 가지고 밖으로 나갈 때 겨울에는 두루마기, 외투 또는 목도리에 감추고 여름에는 옷 가운데 감출 것, 작은 물건 예컨대 편지 등은 신바닥에 감출 것.


전차의 경우, 전차에 타면 바로 차표를 끊고 반드시 뒷문으로 타서 앞문으로 내릴 것. 단 소지품이 있을 때는 앞 좌석에 앉고, 앉을 때 소지품을 무릎 아래에 놓을 것. 정류소마다 주의하고 형사가 전차에 타면 바로 전차에서 내릴 것.


거리에서 연락


정해진 장소에는 정각 1, 2분 전에 그 부근에 가서 정세를 면밀히 살핀 후 현장으로 갈 것.


상대와 서로 시선을 마주치려고 시도하다가 마주친 다음에는 만나기로 정해진 사람의 후방에 붙어 갈 것. 밝은 뒷길에서는 서로 떨어져서 걷고, 노출된 길로 들어설 때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앞뒤로 걸으며, 길을 건널 때는 서로 시선을 마주친 다음 따라가는 자가 먼저 길을 건널 것.


아지트 사용시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낮은 소리로 말할 것.


실내에서는 탁자 위에 부르주아 문학서 등을 나열해 두고 주요 책은 실외에 둘 일.


낙서 특히 이름의 낙서는 엄금할 일. 글자를 쓴 종이는 방 틈 사이에 꽂아둘 것.       
 
이런 식의 구체적인 행동 방식을 열거한 깨알 같이 복사지에 긁어서 쓴 필사본 팸플릿들이었다. 류재우라는 이름은 몇 년 뒤 신문의 일면을 가득 채우며 체포 탈출 잠행 지명수배 등의 머리글자와 함께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그는 체포되어 오랜 세월 구금 되었다. 이이철이 먼저 옥중에서 목숨을 거두었고 류도 일제가 패망하기 불과 십 개월 전에 옥사한다. 용산에서 접촉하던 사람은 이이철과 종씨로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온 인텔리로 나중에 서대문 형무소와 예심 재판정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그것도 수년 뒤의 일이다. 일단 이 씨는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의 접촉선이 되기로 했는데, 통신은 안대길 모친의 밥집이었고 만날 경우에는 용산의 삼개국밥집이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그가 따로 연락을 해오기로 되어 있었다. 


신금이는 그날 방직공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계획되었던 게 아니라 우연히 일어났다고 했다. 손영순이 기계를 조수들에게 맡기고 공장 밖으로 뛰어 나갔고 감독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쫓아 나갔다. 신금이는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다. 


 “야근은 그날 없는 날이고 여섯 시가 다 되었으니 일이 거진 끝나갈 때였다구. 고향에서 영순이 친정엄마가 네 살짜리 아이를 데리구 딸을 만나러 올라온 게야. 수위가 면회는 일체 금지되어 있다며 문 앞에서 쫓아버렸다지. 할머니는 우는 손자를 달래며 공장 문 밖에서 서성거리며 몇 시간을 기다렸어. 드나드는 이에게 달려가 사정을 얘기해 보았지만 어느 시간에든 출입이 마음대로인 사람들이란 높은 사람들이나 일본인이었겠지. 그들은 듣지도 않고 그냥 뿌리치고 들어가 버리곤 했대. 다행히 조선인 기술자가 일본사람들과 들어가다가 사연을 듣게 되었다네.”


그가 공장에 들어와 누군가에게 사정을 알려주었다. 손영순은 아들과 친정엄마가 자기를 찾아 먼 길을 왔다는 소식에 걱정과 기쁨이 뒤범벅이 되어 눈물바람을 하면서 뛰쳐나갔다. 일본인 감독은 중년여성이었는데 미쳐 사정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근무시간에 허락도 없이 기계 앞을 떠나 뛰쳐나가는 조장에게 경고를 했다고 한다. 손영순이 가로막는 수위를 젖히며 통용문을 열고 나가 엄마와 아이를 얼싸안았다. 감독은 성이 나서 씨근벌떡이며 뒤쫓아 와서는 손영순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당겼다. 


 “바카시네(바보 죽어라) 지금 근무시간이야.”


이를 본 엄마가 감독의 등을 두 주먹으로 때렸고 감독은 영순의 머리카락을 놓고는 돌아서서 엄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한번 때리고는 엄마가 휘청거리자 다른 손으로 뺨을 쳤고 그녀가 쓰러질 때까지 양손으로 네 차례나 뺨을 때렸다는 것이다. 손영순은 머릿수건을 벗어 땅바닥에 주저앉은 엄마의 코피를 닦아주며 울기만 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공장으로 돌아가는 감독의 등 뒤에 대고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 책임져야 해!”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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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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