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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슈, 지워지지 않는 육체의 기억

낯설고 생경한, 그래서 더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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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는 순간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바로 알 수 있어요. 엄청난 작품을, 새롭고 아름답고 유일무이한 것을 무대에서 만났다는 걸요. (2019.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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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ay si, si, si… 공연 장면

 

 

피나의 집


어느 인터뷰 도중 인터뷰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제 처음으로 극장이라는 공간, 무대에서 펼쳐지는 예술에 꼼짝없이 매료되었습니까?” “여덟 살…, 피나가 직접 무대에 올랐어요. <카페 뮬러>의 파리 초연이었죠. ”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단어를 고르는 듯, 그의 차분하던 목소리가 점점 느릿해졌다. 파리시립극장(Theatre de la ville)의 극장장으로서 인터뷰 요청에 응한 그의 표정에 어린 소년 같은 웃음이 번졌다. 목소리도 얼마쯤 들떠 있었다. “무대가 아직도 기억나요. 한쪽에 이렇게 의자가 있었고, 피나는 긴 원피스를 입고 느릿하게 무대에 걸어 나왔어요. 그 눈빛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여덟 살에 춤에서 무엇인가를 느꼈다니, 혹시 당신은 춤을 배우고 있었습니까?” 그가 고개를 젓다가 이어서 말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고,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접하면서 자랐어요. 춤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무대에서 펼쳐지는 순간에 대해서는 익숙했죠. 비록 춤에 대해 알지 못하더라도, 피나의 춤은 이미 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 감동을 주는 무엇이에요. 당신도 알지 않나요? 우리는 보는 순간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바로 알 수 있어요. 엄청난 작품을, 새롭고 아름답고 유일무이한 것을 무대에서 만났다는 걸요.”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극장(파리시립극장)이 피나에게는 파리의 집과도 같았어요. 1970년대에 처음 탄츠 테아터 부퍼탈을 시작한 피나가 처음으로 널리 인정받은 곳도 파리였는걸요. 당시에 그녀의 춤은 반 발짝이 아니라 한 발짝 이상 앞서간 예술이라 다 이해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우리 극장은 피나의 아방가르드함을 알아보았고 기다려준 거예요. 1988년부터는 한 해도 빠짐없이 초대했거든요. 우리가 아니라 피나가 먼저 이 무대를 집이라고 불렀어요.“ 그가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언제 피나의 춤을 처음 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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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ay si, si, si… 공연 장면

 

 

고통과 쾌락… 육체의 기억


나는 피나가 직접 무대에 오른 것을 본 적은 없다. 내가 접했던 그녀는 철저히 안무가였고, 피나가 직접 선택한 무용수들이 무대에 올라 펼쳐 보이는 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언제부터 나에게 이 안무가의 이름이 마법의 주문이 되었던가. 파리에서 매번 피나의 작품들을 접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탄츠 테아터 부퍼탈의 공연은 인기가 너무 많아서 일찌감치 시즌 티켓을 통째로 구매하지 않으면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공연 표를 구하기 위해 길바닥에서 한여름 뙤약볕을 받으며 기다리다 얼굴과 두피, 목덜미는 물론 피부가 드러난 모든 부위에 저온 화상을 입고 며칠간 호되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극장 부근에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표를 구하려면 최대한 극장 가까이에 있어야 했다. 길 건너 분수대 부근에 간다거나 근처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다 보면 자칫 기회를 놓칠지도 몰랐다. 횡단보도를 건너 샤틀레 광장의 분수대 근처는 더위가 덜했지만, 길을 건너는 건 극장에서 너무 멀어지는 행위였다. 기다리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표를 살 수 있을 거란 굳은 믿음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쨍한 여름의 햇빛을 받아냈다. 여름날의 해는 유난히도 길어서, 공연 시작 전까지도 사위가 낮처럼 환했다. 저녁에 공연될 그녀의 춤을 보기 위해 모두가 그렇게 정오가 되기 전부터 기다림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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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ay si, si, si… 공연 장면

 

 

갑작스레 못 오게 된 일행 때문에 딱 한 장의 표가 남는다는 사람에게서 표를 사고 운 좋게 피나의 마지막 작품인 <…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ay si, si, si…>를 보았다. 칠레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침묵과 음표 사이에 놓인 진한 감정들이 우리를 온통 휘젓고 지나갔다. 객석에서 우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춤이 주는 본연의 감동에, 이런 안무가를 이제 우리가 잃었구나, 하는 애도의 마음이 더해진 탓이었을까. 모두가 좀 더 많이 울었다. 펑펑 울다가 극장을 나서니 어둠 속에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곳곳에 돋아난 붉은 발진과 피부의 통증이 느껴졌다. 온몸이 햇빛에 익어버린 상태였다. 잔뜩 붉어진 피부에 알로에 젤을 펴 발랐다. 두피, 얼굴 목덜미, 팔, 발등, 가슴팍…. 바르다 보니 튜브에 든 알로에 젤이 영 미적지근했다. 케이크에 생크림을 덧바르듯 찻잔 받침 접시에 알로에 젤을 가득 짜내 편평하게 높이를 맞춰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었다. 20분 있다가 표면에 냉기가 묻은 젤을 꺼내 발랐다. 그제야 열기가 식으며 통증이 사라지는 듯싶었다. 욕실 세면대 앞에서 온몸을 뒤틀며 최대한 팔을 길게 뻗어 목덜미와 등에도 알로에 젤을 발랐다. 얼어붙은 미끄덩한 젤이 곧 등판으로 흘러내렸다. 차가운 감촉에 몸서리를 치다가 문득 거울을 보았다. 그로테스크한 포즈를 취한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야밤에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피나의 춤이 말 그대로 육체적 고통을 가했네, 라며 이야기를 듣던 그도 웃었다. 그녀의 춤이 얼마나 특별한지, 고통보다도 피나의 춤 덕분에 황홀한 마음이 더 컸다고 말하자 그가 고통과 쾌락, 황홀함은 육체의 기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고 답했다. 그는 피나가 타계한 직후 무대에 올라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담담하면서도 절절하고 애정 어린 추모사였다. 여덟 살에 그녀의 춤을 보았으니 그랬구나, 당시에는 말해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전해 들은 이제야 이해가 갔다.

 

 

파리시립극장장 에마뉘엘 드마르시-모타(ⓒJean-Louis Fernandez) (1).jpg

파리시립극장장 에마뉘엘 드마르시-모타(ⓒJean-Louis Fernandez)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이 되는 일


내 앞에 마주앉은 그도 피나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울컥하며 감정이 솟구치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처음 접한 그녀의 춤은 마치 조각도가 판화 원판을 깊이 새긴 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주르카 포고> 그 파두 선율이 아직도 생각나네요.” “포르투갈어도 할 줄 알아요?” 포르투갈어에 능통한 그였다면 아마도 그 가사를 다 알아들었겠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낯선 발음의 단어들이었어요. 그냥 목소리와 선율만 따라갔어요.”

 

우리는 때로 알지 못하는 낯선 것들과 예기치 않게, 불현듯 조우하기도 한다. 그 생경함에 기반한 만남은 파열음, 혹은 충격을 몸에 남기고 지나간다. 처음 맛보는 낯선 향신료, 커피나 초콜릿이 그러하듯 말이다. 낯선 외국어로 발음된 대상과의 거리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다. 그대로 낯선 존재로 머무른 채, 작품이 끝난다. 우리는 그저 영문도 모르고 예술 작품이 가져다주는 아우라에 경도된 채로 남겨질 뿐이다. “그건… 처음 오페라를 보러 갔을 때 같았어요. 전혀 가사를 알아듣지 못했으니까요.” 언어적 정보 없이 온 감각을 총동원해 음악을 듣고 느끼다 보면, 어느덧 해일처럼 큰 감정의 파도가 밀려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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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시립극장장 에마뉘엘 드마르시-모타(ⓒJean-Louis Fernandez)

 

 

나의 첫 오페라가 무엇인지 묻던 그가 갑자기 판소리 이야기를 했다. “내가 판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그랬어요. 낯설고 생경한 것인데 그래서 더 아름다웠죠. <춘향가>였나. 한국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래도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그가 갑자기 유창한 포르투갈어로 몇 마디를 쏟아냈다. 페소아의 문장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이 되는 일이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 느낀다면 느끼는 것 역시 불가능해진다.” 포르투갈어를 말하는 그의 목소리며 표정이 꽤나 달랐다. 다시 프랑스어로 돌아온 그가 말을 이었다. “예술 작품을 경험한다는 건 끝없이 나로부터 멀리 가는 것이고, 머나먼 이국에 도착하는 것과도 같아요. 피나 덕분에 우리는 더 수월하게 타인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만났네요. 당신은 참 멀리 왔군요.”

 

나는 말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가 페소아의 초기 시집 속 문장들을 몇 구절 더 낭송했고, 불안의 책』  만 읽은 나는 다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문장들이었을까. 얼마든지 질문을 던질 수 있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이국의 언어들은 때때로 뜻을 알지 못하는 채로 남아 있을 때가 더 아름답다.


 

 

불안의 책페르난두 페소아 저 | 문학동네
페소아가 191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약 20년의 세월 동안 틈틈이 공책이나 쪽지에 기록한 단상들을 모은 고백록이다. 소아르스가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는 표제 아래 써내려간 481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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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나희(클래식음악평론가)

파리에서 피아노와 법학을 공부했다.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접하고 글로 남긴다. 바흐와 말러, 바그너, 피나 바우슈를 위해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인터뷰집 <예술이라는 은하에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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