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는 내게 상상 이상의 행복이었다
『임신중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역사화는 여성의 임신중지 관련 선택에 어떤 제약이 가해졌는지 밝혀내는 동시에, 그런 제약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고 바뀔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2019. 05. 29)
일 년 전쯤 매디슨가에 있는 가족계획협회에서 임신중지를 했다. 나는 이 경험을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한 일로 기억한다. (…) 여전히 ‘좋은 여성’에게 임신중지란 슬픔ㆍ수치ㆍ후회를 동반하는 경험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나도 선량한 사람이다. 그러나 임신중지는 내게 상상 이상의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엄마가 되도록 강요받지 않을 수 있다는데 행복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나.
- 아멜리아 보노
이 책은 임신중지에 대한 ‘상식적인 감정’을 꾸준히 검토한 첫 번째 연구다. 이 연구에서는 임신중지와 반복적으로 엮이는 특정한 감정들이 여성에게 임신중지의 문화적 의미를 각인한다고 본다. 임신중지를 ‘잘못’이나 ‘죄악’으로 노골적으로 명명하는 대신에 ‘선택’이라는 수사rhetoric를 끌어들여 감정을 작동시킨다는 이야기다. 감정은 임신중지를 단속한다. ‘임신중지 금지’를 대놓고 말하지 않되, 임신중지의 경험과 그 결과라는 각본에 따라 공유된 의미에 반 反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이를테면 ‘여성이 임신중지 뒤에 깊은 슬픔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임신중지는 본래 애통함과 수치를 야기하는 절차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는 여성이 간절히 원한다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과도 분명 양립하지만, 그와 동시에 임신중지가 자신에게 타격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임신중지와 부정적인 감정을 자꾸 엮다 보면, 합병증이나 해로운 부작용 없이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임신중지를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묶어 두게 된다.
여성 세 명 중 한 명꼴로 살면서 한 번은 임신중지를 경험한다. 전 세계적으로 임신 네 건당 한 건이 임신중지로 이어진다. 임신중지는 무척 흔한 일이며, 여성이 임신중지 이후 부정적인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실제로 임신중지 경험에 대한 심리학 및 사회학 연구에서는 긍정적인 감정이 더 자주 보고된다. 임신중지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이며 일반적으로 별다른 문제없이 일어나는 절차다. 다만 규범적 여성성이라는 것이 임신중지에 대한 그런 인식의 확산을 가로막고 있다.
임신한 여성이 모성에 관해 결정할 때 행사하는 자유에는 ‘선택’이라는 수사가 붙는다. 이 표면적 자유가 임신중지에 대한 확고부동한 감정 각본을 은폐한다. 임신한 여성이 겪는 감정세계에 엄격하게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여성의 삶은 모성에 맞춰 설계되고 모성만이 여성,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참된 행복을 약속한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 이 규범적인 도식에서 행복은 오로지 모성에만 한정되고, 임신중지는 부정적인 어휘로만 상상된다. 우리가 임신중지라는 경험을 힘들고 불쾌하고 유해하다는 감정을 통해서만 계속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임신한 여성은 임신을 중지할지 계속할지를 ‘선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이 선택은 일탈적이고 해로운 선택이 된다. 그래서 여성이 모성을 거부한다는 신호와도 같은 이 절차는 모성이라는 규범 안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선택이라는 수사는 임신한 여성을 자유롭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로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선택에 따라붙거나 그 선택을 통제하는 감정적 효과는 감춰 버린다. 이 책은 특정한 감정을 거쳐 ‘진실’로서 유통되는, 임신중지에 대한 가정을 파헤친다. 또한 임신중지가 감정적으로 이롭고 심지어 행복한 선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은폐하면서, 임신중지를 수치스럽고 애통한 선택으로 보는 일이 왜, 어떻게 이토록 이론의 여지없이 흔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한다. 우리는 특정한 감정이 임신중지와 얽히는 과정을 탐구해 나가며, 역사적으로 그 감정에 규범적 여성성을 요구하는 투쟁이 모종의 결과를 낳은 사실을 보게 된다. 이렇듯 역사화는 여성의 임신중지 관련 선택에 어떤 제약이 가해졌는지 밝혀내는 동시에, 그런 제약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고 바뀔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 책의 원제는 ‘행복한 임신중지Happy Abortions’이지만, 나는 임신중지를 불가피하게 어렵고 불행한 사건으로 묘사하던 것을 ‘행복’이라는 단일한 재현으로 교체하려는 게 아니다. 책의 제목은 이런 질문에서 나왔다. ‘무엇이 행복한 임신중지의 가능성을, 가장 좋게 봐서 규범을 위반한 것, 가장 나쁘게 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임신을 원치 않은 여성의 관점에서 임신중지를 바라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이 있고 그 수단이 비교적 직접적이며 고통을 주지 않는데도 자꾸만 불행으로 재현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터무니없다. 의도치 않게 임신한 여성의 관점에서, 우리는 임신중지가 견뎌야 할 것이 아니라 축하 받을 선택임을 알 수 있다.
구조적 불평등을 당사자 임신중지 서사로 대신하려는 문제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미안해하지 않는’ 임신중지 서사는 가치가 있다. 임신중지라는 결정은 이롭고 삶을 고취시키는 결정이 될 수 있다. 바로 그때 여성은 정당한 주체의 자리를 얻는다. 모성이 임신한 여성에게 진정 유일하게 ‘행복한’ 선택으로 남는 한, 임신중지는 여성이 스스로 정당화해야 하거나 타인에게 숨겨야 하는,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태아를 중심에 둔 모성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준다면, 다른 감정들 역시 임신한 이들의 다양한 주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캠페인은 프로초이스 운동과 학계에 반드시 필요하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에리카 밀러> 저/<이민경> 역21,600원(10% + 5%)
‘차악’, ‘필요악’이라는 임신중지에 관한 ‘상식’은 국가, 민족, 계급, 인종, 장애, 젠더를 둘러싼 ‘정치 역학의 산물’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촉발된 임신중지 논의의 출발점은 ‘감정’이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로 이어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사회가 여성을 결정과 선택의 주체로 공인한 사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