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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야 비로소 조금 낡았다

세월을 간직한 것들은 그 시간만큼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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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온 이야기를 묵묵히 담아내고 성실하게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생긴 흔적들, 상처들이 사람도 물건도 고유하게 만든다. (2019.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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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더이상 ‘운동화’가 아니게 될, 그래도 버리지 못할 이 운동화


시간이 만들어내는 안정감이 있다. 오래된 관계가 주는 편안함과 손때 잔뜩 묻은 물건만이 가진 부드러움, 할머니, 하고 부를 때면 주변의 온도가 2도쯤은 오르는 것 같은 기분, 자연스럽게 바뀌는 공기와 그 속에서 느껴지는 포근함. 누구도 급하게 억지로 가질 수 없고 꾸며낸 유사품은 금세 티가 나고 마는 것. 그런 대체할 수 없는 무엇때문에 새 것보다는 낡은 것이 좋다. 겪어온 이야기를 묵묵히 담아내고 성실하게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생긴 흔적들, 상처들이 사람도 물건도 고유하게 만든다.

 

얼마 전 퇴근길에 연락을 한 친구는 스무 살의 어느 날이 문득 떠올랐다고 했다. 돌아보면 우당탕 뛰어다니는 날의 연속이었던 그때를 이제와 가만가만 걸으며 한참을 추억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대화는 ‘그때 참 좋았지.’에 도착했다. 응, 근데 지금이 더 좋아. 라고 대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다음 말은 ‘그치 벌써 이게 몇 년이냐. 우리도 참 오래됐다. 그때는 진짜 재미있었지.’였는데, 그것이 ‘지금이 더 좋아’가 됐다. 말로 뱉어 내니 새삼 분명해졌다. 지금이 훨씬 좋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들이 생각보다 괜찮은 거름이 되었는지, 마냥 과거가 그리운 오늘은 아니라 다행이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보면 나는 이제야 비로소 조금 낡았고 인생에 나쁘지 않은 자국 하나를 새긴 것은 아닐까?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일정은 빈티지 가게 방문이다. 가볼 만한 곳을 여러 군데 미리 찾아보고 최소 반나절은 시간을 비운다. 과거에는 빈티지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름’에서 오는 걱정과 공포였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사용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물건이니까. 영화 드라마 소설을 과다 섭취한 영향도 있다. 필요 이상의 상상력이 발동됐다. 이 반지만 끼면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알고 보니 직전 주인이 어마 무시한 사건에 연루되어서 말이지, 쩜쩜쩜, 후덜덜. 생각이 바뀐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다, 결론만 말하자면 세상은 모든 곳에 추리 수사 드라마를 심어 놓지는 않는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일상이다. 세월을 간직한 물건들은 그들이 건너온 시간만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작은 흠 정도는 있는 게 매력이다. 경계심을 품게 했던 상상은 생경한 과거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빈티지숍을 2대째 운영 중이라는 그녀는 어릴 적부터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그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서 즐겁다고 했다. 오래된 찻잔과 낡은 트렁크, 전등, 인형 등 빈티지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즐비한데, 가게의 역사를 듣고 보니 어느 하나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유서 깊은 상점에 들어가 그 역사를 체험한 여성에게 차 한 잔 얻어 마시는 행운이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는다.
-이화정,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  149쪽

 

2015년부터 같이 여행을 다닌 운동화가 있다. 가볍고 편해서 쭉 함께해온 친구인데 이제는 이 아이도 기운이 꽤 빠졌다.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여기저기 몸이 많이 상했고 이제 슬슬 쉬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미안하게도 아직 놓아줄 수가 없다. 겉모습이 어떻든 나는 여전히 이 운동화에 가장 두근두근한다. 걸어온 길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걸어갈 길들을 그려보기도 한다. 낯선 도시 돌길을 부지런히 헤매고 다닌 기억, 갑자기 쏟아진 비에 찰박찰박 한참을 다녀야 했던 기억, 지나온 수많은 날들이 촉촉하게 차 올랐다 마르기를 반복하며 단단하게 자리잡았다. 시간이 더 흘러 언젠가는 더이상 ‘운동화’가 아니게 될 이 운동화를 그때도 나는 아마 버리지 못할 것이다.

 

‘도처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물은 흐르는 시계고 꽃은 피어나는 시계고 사람은 늙어가는 시계’라고 한 함민복 시인의 말처럼, 운동화도 반지도 여행도 모두 시계다. 우리도 시계다. 우리는 마주 기대어 늙어가는 시계다. 그렇게 낡아가며 서로에게 지지가 되고 위안이 되는 향기와 온기를 더하고 있다. 더 잘 낡아가고 싶다.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이화정 저 | 북노마드
영화 기자로 겪은 다양한 여행 일화, 영화 속에서 발견한 빈티지 단상, 그리고 저자가 직접 찍은 농도 깊은 ‘필름 사진’도 책의 재미와 아련한 정서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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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형욱(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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