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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이야기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나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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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빌미로 퇴임을 요구하는 말에 “저는 힘 닿는 데까지 일할 것입니다. 그럴 수 없게 되면 물러날 때가 된 것이죠”라고 정중히 거절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더욱 ‘악명 높은 RBG’로서 신랄한 반대 의견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2019. 0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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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나는 반대한다>의 한장면

 

 

몇 년 전 <노터리어스 RBG> 힙합 랩의 흥이 터져나왔다는 바다 건너 소식을 들었다. 동명의 평전이 나왔다고도 했다. 한국에도 3년 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85세 현직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의 이름을 딴 RBG 현상. 현재 상영 중인 다큐를 보고 나니 그 랩의 가사란 몹시 리얼한 것, 평전은 더욱 리얼한 것. 과연 슈퍼 히어로다.
 
우리에게도 얼마 전 ‘낙태죄 헌법불합치’의 역사적인 판결이 있지 않았던가. 미국에서 2014년 피임을 직원 건강보험에서 제외한 것에 반대한 사건에 대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판결문은 너무나 명료했다. “여성의 동등한 참여를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려하기 위해 보장해야 할 것은 출산에 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다.”
 
미국의 여성사를 새롭게 쓴 법조인. 밀레니얼 세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할머니. 티셔츠, 가방은 기본이고 몸의 타투에도 RBG 이미지가 등장했다. 패러디 오마주 TV 프로그램도 생겼다. 이 RBG 열풍이 갑자기 불어온 건 아니다. 일련의 소송 사건을 통해 양성 평등과 차별을 반대하는 이상적인 실천가로 일해온 휴머니스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모여 커다란 바람이 되었다. 지금도 인류 발전에 장애가 될 만한, 기득권에 안주하는 다수 의견에 대해 “나는 반대한다”는 제 목소리를 내는 RBG는 누구나 함께 사진 찍고 싶어하고 사인받고 싶어하는 스타다.
 
다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풍부한 자료와 역사적인 사건에 얽힌 인물 취재 등을 통해 입체적이고 설득력 또한 충분한 영화가 되었다. 193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루스의 어린 시절과 코넬대, 하버드 로스쿨과 컬럼비아 로스쿨을 거치는 학창 시절과 남편 마티 긴즈버그와의 결혼 생활, 1960년대 럿거스대 법대 교수로서 ‘여성과 법’ 강좌 개설, 1970년대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여성권익증진단 공동 출범과 활동, 1980년대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의 판사, 그리고 1993년 빌 클리턴 대통령 지명으로 연방대법원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현재까지. 그녀의 역사는 개인적인, 결코 개인적이지 않은 행로가 된 것이다. 기록 중심의 건조한 방식이나 찬양의 일변도가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약자와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어려움을 견뎌내는 모습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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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미국 사회에서 각인된 것은 1973년 ‘프론티에로’ 사건이었다. 공군 소위 ‘프론티에로’가 기혼 남자 동료들이 받는 주택 수당을 당당히 받기 위해 제기한 대법원 소송이었다. 남녀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했던 당시 사회에서 위헌을 선언하기에는 어려운 분위기였다. 변론을 맡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글과 말의 논지가 통렬히 강조되도록 미국 건국 이래 여성이 당해온 차별을 나열했다. 열등하다는 낙인, 종속적이고 의존적이고 너무 나약해서 투표할 수 없다는 인식, 인적 자원의 낭비라는 편견, 법원의 남성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등 시민 취급의 역사를 읊었다. 특히 이 역사적인 문장, 1837년 노예제 폐지론자이며 양성 평등 지지자인 ‘세라 그림케’의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라는 말을 인용해서 승소를 이끌었다. 이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승소 사건 여럿은 미국의 차별의 역사를 바꾸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대한 호감은 그런 역사적 승리와 또 다른 차원에서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작고 연약한 몸으로 두 번의 암 투병을 했고, 꾸준한 근육 단련 운동과 스타일리시한 옷차림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저음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80대 법조인의 매력에 누구나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남편 마티 긴즈버그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코넬대 재학 시절 만나 결혼한 마티는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도 아내의 공적인 업무에 가장 강력한 지원자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에는 “당신은 내 평생에 유일한 사랑이었어. 56년 전 코넬대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했어. 내가 떠나도 잘 버텨주면 좋겠어.”라고 적혀 있었다.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한’ 남편의 힘으로 루스는 절망하지 않고 세상의 무수한 편견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승리한 것이다.
 
나이를 빌미로 퇴임을 요구하는 말에 “저는 힘 닿는 데까지 일할 것입니다. 그럴 수 없게 되면 물러날 때가 된 것이죠”라고 정중히 거절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더욱 ‘악명 높은 RBG’로서 신랄한 반대 의견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루스 없이는 진실도 없다’는 구호의 의미를 알겠기에. ‘노터리어스’ 이미지로 누군가의 목을 밟은 발을 치워버렸다는 것을, 그것이 이렇게 매혹적인 것임을 우리 모두 깨우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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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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