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봄바람도 구설수에 오를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관대하게 하라는 뜻이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누군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한 자는 유죄다. 봄의 처지에선 모두가 유죄다. (2019. 03. 07)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아랫집 여자 바람난 게 봄바람 때문이라는 설, 옆집 할머니 돌아가신 것도 봄바람 때문이라는 설, 미세먼지 가득한 올봄은 ‘새 봄’이 아니라 ‘헌 봄’이라는 설… 봄바람도 구설수에 오를 때가 있다.

 

얼마 전 시 창작 수업 때 수강생의 시를 읽고 평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내 딴에는 쓴 사람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부터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라고 느낀 부분이 안타까워서(안타까움은 대체로 오지랖과 친분이 깊다), 쓸 데 없이 열과 성을 다해(때로 이게 문제가 된다!), 문제점을 꼼꼼히 이야기했다. 이게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나 보다. 다음 날, 그는 내 말을 곡해해 지인들에게 문자로 성토하고, 자기들끼리 나눈 이야기를 트위터에 올려 내게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그들은 나를 인성이 나쁘고, 가스라이팅1을 행한 시인으로 ‘판결’내렸다. 시 쓰는 자의 정체성을 혼란하게 했으니, 당장 사과하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꿈속의 일인 듯 그냥 바라보았다. ‘이거 실화냐?’ 요새 유행하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려 보면서.

 

그날, 반나절도 되지 않아 그는 제 풀에 사과 메일을 보냈다. 자신이 혼란스러운 나머지 이성을 잃었노라고, 공론화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며, 죄송하다 했다. 나도 답장을 썼다. 당신의 오해와 내 오지랖에 대해(그냥 적당히, 감상이나 말할 걸 그랬나) 짚고, 마음이 다쳤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실 그의 무례와 몰상식함에 분노를 느꼈지만, 혼자 고요히 삭혔다.

 

‘대인춘풍(對人春風)’이란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관대하게 하라는 뜻이다.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역풍이나 전복(顚覆) 따위는 없는, 순한 말만 할 걸 그랬나? 깃털로 임금님 귀 파드리듯? 당신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듣기 좋은 이야기만 골라 했을 거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은 채, ‘무사’할 테니까. 그런데 진정 ‘무사’를 원하는가? 당신이 내 말에 펄쩍 뛰었다면, 분노와 정체성 혼란을 느꼈다면, 다시 냉철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픈 건 당연하다. 나를 나무라는 것보다 때로 내 창작물을 나무라는 게 훨씬 쓰라리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누군가의 칭찬의 말이 아니다. 혼자 눈물 흘리며 머리를 쥐어뜯게 한 말, 이 갈며 분투하게 한 말, 뼈아픈 말, 내 취약함을 까발린 말, 혈을 제대로 짚어 몸을 굳게 만든 말들이 나를 발전하게 했다.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창작자로 만들었다. 물론 나는 그의 혈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화만 돋우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가 났다면, ‘왜 나는 이렇게 분개하는가?’ 생각해봄직하다. 시를 쓰네, 못 쓰네, 할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 때문에 쓰고 못 쓰고 할 시라면, 안 쓰는 게 낫지 않나?

 

“과녁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 두부 속을 파고 들어가는 뜨거운 미꾸라지처럼
머리통을 과녁판에 묻고 온몸을 흔들고 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속도로 나무판 두께를 밀고 있다”

- 김기택 「화살」 중에서, 시집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수록.

 

이 시에서 ‘화살’을 ‘말(言)’로 치환해 읽어 본다. 내게서 떠나 과녁에 박힌 말. 죽지도, 도착하지도 않고 상대의 가슴팍에서 여전히 “꼬리를 흔들고” 있는 말. 박히고 있는 중인 말. “온몸을 흔들고”있는 말. 무서워라! 생각해 보니, 그의 무른 마음에서 아직도 내 말(言)이, 미친 말(馬)처럼 달리고 있을 것 같아 미안한 맘도 든다. 나쁜 말은 누군가를 상하게 할 요량으로 하는 말이다. 그건 말이 아니라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작품을 두고 내가 한 말이 당신을 상하게 할 요량이었겠냐고, 한숨이나 쉬어본다.

 

죄란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 누군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한 자는 유죄다. 봄의 처지에선 모두가 유죄다. 바람의 처지에선 미세먼지가 유죄다. 미세먼지 처지에선 공기청정기가 유죄다.

 

그저 빌어보는 수밖에. 과녁이여, 화살을 뱉어라. 네게 묻은 똥을 버려라.

 

 


 1. 가스라이팅(gaslighting):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위키백과)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김기택 저 | 현대문학
여섯 권의 시집이 각 시집마다의 독특한 향기와 그윽한 시적 매혹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시와 예술, 이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낸 영혼의 조화로움 덕분일 것이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김기택> 저7,200원(10% + 5%)

현대문학의 새로운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이 반년간 만에 두 번째 컬렉션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Ⅱ』를 선보인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충분히 조명한다는 취지로 월간 『현대문학』 특집란에 2018년 1월호부터 6월호까지 수록되어 독자들을 먼저 찾아간 바 있는 여섯 시인―김행숙, 오은..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아직도 플라톤을 안 읽으셨다면

플라톤은 인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고 평한 화이트헤드. 우리가 플라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아직 그의 사유를 접하지 않았다면 고전을 명쾌하게 해설해주는 장재형 저자가 쓴 『플라톤의 인생 수업』을 펼치자. 삶이 즐거워진다.

시의 말이 함께하는 ‘한국 시의 모험’ 속으로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46년간 한국 현대 시의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한 문학과지성 시인선. 이번 600호는 501부터 599호의 시집 뒤표지 글에 쓰이는 ‘시의 말’을 엮어 문지 시인선의 고유성과 시가 써 내려간 미지의 시간을 제안한다.

대나무 숲은 사라졌지만 마음에 남은 것은

햇빛초 아이들의 익명 SNS ‘대나무 숲’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2학기의 어느 날. 유나의 아이돌 굿즈가 연달아 훼손된 채 발견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소문과 의심 속 학교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온,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소문 속 세 아이의 진실 찾기가 지금 펼쳐진다.

성공을 이끄는 선택 기술

정보기관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며 최선의 의사결정법을 고민해 온 저자가 연구하고 찾아낸 명확한 사고법을 담았다. 최고의 결정을 방해하는 4가지 장애물을 제거하고 현명한 선택으로 이끄는 방법을 알려준다. 매일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나를 바꿀 최고의 전략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