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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라는 자연현상 : 70대인 동시에 스물 다섯인 마법
세월의 흔적도 생활의 그늘도 모두 지워낸 41년생 김혜자의 스물 다섯
‘혜자’를 연기하는 김혜자를 보고 있자면, 칠순의 육체에 갇혔으되 마음 안엔 여전히 뜨거운 불덩이가 들어 앉은 스물 다섯 청춘이 보인다. (2019. 02. 25)
김혜자는 연기를 잘한다. 전국민이 알고 있는 이 새삼스러운 찬사를, JTBC <눈이 부시게>(2019)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반복하게 된다. <눈이 부시게>의 주인공은 교통사고로부터 아빠(안내상)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반복해서 뒤로 감았다가 그 대가로 하루 아침에 육신의 젊음을 잃은 스물 다섯 청년 ‘혜자’로, 조금만 방심하면 노년의 배우가 젊음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어색함을 피하기 어려운 배역이다. 그런데 ‘혜자’를 연기하는 김혜자를 보고 있자면, 칠순의 육체에 갇혔으되 마음 안엔 여전히 뜨거운 불덩이가 들어 앉은 스물 다섯 청춘이 보인다. 오빠 영수(손호준)와 티격태격하는 순간,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순간순간마다 김혜자의 얼굴 위로 젊은 날의 혜자를 연기한 한지민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마법을, 가난한 글재주로는 다 설명할 재간이 없다.
어쩌면 오로지 김혜자이기에 가능한 배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민 엄마’라는 오래 된 관용어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 가만히 생각해보면 김혜자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가슴 속에 어른이 되지 않은 부분을 한 조각쯤 품고 있었다. tvN <디어 마이 프렌즈>(2017)의 희자는 아들 민호(이광수)에게 기대는 대신 절친인 정아(나문희)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어린아이처럼 무너져 내렸고, KBS <엄마가 뿔났다>(2008)의 한자는 자신만의 삶을 찾으러 원룸을 구하고는 짐을 실은 트럭에 올라 까르르 웃으며 집을 나섰다. MBC <궁>(2006)의 황태후 박씨는 궁궐 어른 중 손자며느리인 채경(윤은혜)과 눈높이를 맞춰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SBS <홍소장의 가을>(2004)의 영숙은 평상에 앉아 은퇴한 남편(최불암)과 소주를 홀짝이다 말고 남편에게 기습키스를 하고는 돌연 울음을 퍼 올리는 캐릭터였다. 천진한 눈망울과 예측을 불허하는 몰입, 가득 찬 물잔처럼 찰랑이는 감정의 파고까지, 김혜자가 연기한 인물들은 사회와 가정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세월에 깎여 무던해지는 일이 없는,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을 간직한 인물들.
그리고 그 어린아이는 <눈이 부시게>에서 찬란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직접 싼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아빠가 일하는 아파트 경비실을 찾아온 혜자는, 자꾸 멸치볶음 반찬을 남겨 오는 아빠에게 “오늘은 다른 반찬 싸왔으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장난기 가득한 눈, 윗니 열 개를 모두 드러내며 씩 웃어 보이는 함박웃음, 애정을 주체하지 못해 위아래로 들썩이는 눈썹까지. 세월의 흔적도 생활의 그늘도 보이지 않는 그 천진하고 싱그러운 미소 앞에서 나는 무장해제된다. 한 사람이 70대인 동시에 스물 다섯인 마법. 김혜자는 차라리 자연현상이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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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