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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더 먹는다

‘나이답게’는 됐다. 나답게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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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특히 한 해의 끝과 시작에는, 사라진 것들을 놓쳤음에 아쉬워했고 그림자라도 보인다 싶으면 다시 잡아보려 애썼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오늘에 더 집중하는 삶으로 옮겨가고 있다. (2019. 01. 18)

핀란드 수오멘린나.jpg

                           핀란드 수오멘린나. 이만큼의 햇살과 바람, 때로는 하늘과 바다, 쉬어갈 그늘이면 그것으로 좋겠다.

 

 

한 살 더 먹었다. 완료형이나 과거형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수동형으로 읽게 된다. 앞에 아- 하는 탄식을 붙이면 당했다는 느낌은 배가 된다. 떡국에 부록처럼 딸려오는 숫자 하나가 참 싫었던 것은 어쩌면 이런 기분 탓은 아니었을까? 스물 넷에도 일곱에도 아홉에도 그 형태나 크기만 다를 뿐 늘 걱정과 불안과 짜증과 한숨이 그 시간 어딘가에 찰싹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영을 지나 하나 둘 셋이 되면서 ‘뭐 생각보다 별 거 없네.’가 되었으며, 걱정과 불안과 짜증과 한숨의 자리는 이내 안주 나태 반복 핑계 같은 것들이 물려받았다. 시간은 더 빠르게 흘렀다.

 

안주의 날들은 어땠더라. 일을 열심히 했다. 일만 열심히 했다. 어쨌든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특수한 몇몇 상황들을 제외하고는 아마 아주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열심’이라는 말이 영 개운치 않은 거다. 자신에게는 그 ‘뜨거운 마음’을 나눠주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그냥 존재하는 나에게 안주했다. 돌아보니 과연 그렇다. 열심도 정도껏이다. 정도껏이라야 숨을 쉬고 숨을 쉬어야 다음이 있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손에 쥐었다. 아마 그때가 안주의 날들이 끝나갈 무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문태준,  『먼 곳』


머릿속에 이리저리 그어 놓은 선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내 마음을 꿰뚫어본 시인에게 감탄하며 차분히, 하지만 감출 수는 없으니 별수 없이 호들갑스럽게 시어 하나하나를 꼭꼭 곱씹어 외우고 찍어 휴대폰 배경화면에도 넣고 한참을 쥐고 다녔다. 호들갑이었던 것을 보니 그때쯤 안주의 시간을 벗어난 것이리라 그저 짐작할 뿐이긴 하나, 분명한 것은 이 한 편의 시가 초콜릿처럼 꺼내 먹는 노래처럼 늘 손 닿는 곳에 있어준 덕분에 많은 순간들을 견뎠다. 시를 절실하게 붙들고 또 한 계절을 건넜다.
 
나의 시간은 이제 크립톤(Kr)과 루비듐(Rb) 사이 어딘가를 지나는 중이다. 올리버 색스가 여든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80번 원소 수은의 이름을 딴 글 「수은」을 읽고는 원소들의 번호를 찾아보았다. 나는 어디쯤 와있는 걸까? 크립톤의 원소명 어원은 그리스어 kryptos. ‘숨겨진 것’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맛, 색, 냄새가 없는 원소다. 루비듐은 ‘진한 붉은색’을 뜻하는 라틴어 rubidus에서 시작한 이름이다. 좋을 대로 하는 아무 말이지만, 무색 무취 무미의 포장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빛깔이 선명해지고 있다.

 

오늘의 색이 유독 그렇다. 오늘이 중요하다고 누가 어떻게 말해도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내일이었다. 준비와 대비의 연속이었다. 일부는 쓸모를 찾았고 몇몇은 여전히 준비의 이름으로 거기 남았고 상당수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때가 되면, 특히 한 해의 끝과 시작에는, 사라진 것들을 놓쳤음에 아쉬워했고 그림자라도 보인다 싶으면 다시 잡아보려 애썼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오늘에 더 집중하는 삶으로 옮겨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227쪽

 

물론 나는 아직 대단한 뭔가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아닌 것 같다. 다만 온전히 내 삶을 살 수 있기를 전보다 더 강하게 바라게 됐다. 이런 저런 ‘피치 못할’ 사정이나 사람에 휘둘리지 않고 내 사람들과 함께 건강하게 매일을 꾸려갈 방법을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달라질 오늘과 또 다른 오늘들을 기대하고 있다. ‘나이답게’는 됐다. 나답게 살 수 있기를. 한 살 더 먹는다. 기꺼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저/김희정 역 | 부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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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형욱(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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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저/<김희정> 역11,550원(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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