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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예찬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슬픈 날은 슬퍼서, 기쁜 날은 기뻐서 김밥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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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오래 전 만삭의 몸으로 나를 찾아온 친구와 들어간 곳이 김밥집이었다. (2018. 12. 13)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아름답고 간결한데 속은 꽉 차있는 음식이 있다면?
김밥이다.

 

김밥은 오묘하다. 다채로운 동시에 단순하다. 동그랗게 뭉쳐 있지만 펼쳐놓으면 언제든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펼친 모양으로 시작해, 돌돌 말아 기다래지고, 썰어놓으면 납작한 원기둥 모양의 ‘한입 음식’으로 완성된다. 재료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김밥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이는 드물다.   

 

누워있는 김 한 장(대체로 김은 누워있지만)을 상상해 보자. 캄캄한 밤처럼 누워있는 김 한 장. 그 위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해 고소해진 밥을 한 주먹 펼쳐 놓는다. 고루 펼쳐지도록 손끝으로 살살 달래가며 밥을 펼치면 ‘눈 쌓인 밤’처럼 보인다. 그 위에 길게 길게 기찻길을 내듯, 재료를 올린다. 채 썰어 볶은 당근, 구운 햄, 계란부침, 단무지, 맛살, 시금치, 우엉 등을 올린다. 김밥은 정해진 레시피가 없다. 집에 있는 재료 중 원하는 것을 넣으면 된다. 명태젓갈이나 멸치볶음, 씹는 맛이 좋은 견과류를 으깨 넣어도 좋다. 자, 이제 당신 앞에는 펼쳐진 채 완성되길 기다리는 김밥의 전신(前身)이 있다. 저희들끼리 돌돌 말려 뭉쳐지기를, 완벽한 밤 한 장에 싸이기를 기다리는 재료들. 김밥 마는 발을 조금씩 굴려, 손으로 꼭꼭 눌러 말면 작은 방망이 모양의 김밥이 탄생한다. 다 된 김밥을 쟁반 위에 놓고 또 다른 김 한 장을 펼친다. 재료가 떨어질 때까지 전 과정을 반복. 번거롭다 생각하면 번거롭고, 간단하다 생각하면 간단하다.

 

참기름 바른 칼로 자르면 속속들이 드러나는 환한 얼굴. 김밥은 잘라야 얼굴이 나오는 음식이다. 여러 번 잘라도 같은 얼굴이 나오는 음식. 신기한 점은 같은 재료로 말았는데 더 맛있는 김밥과 덜 맛있는 김밥이 생긴다는 거다. 비쩍 마른 김밥과 뚱뚱해서 터질 것 같은 김밥이 있는 것처럼. 대부분 김밥은 단정한 모양으로 탄생해 단정하게 (입속으로) 사라지지만, 가끔 되바라진 김밥, 막무가내인 김밥이 태어난다. 옆구리를 뚫고 기어이 탈출하는 재료들이 있고, 깔끔하게 붙은 줄 알았던 김이 떨어져 모양이 풀리기도 한다. 되바라진 김밥, 이건 사람을 좀 추저분하게 만든다. 주섬주섬, 손으로 주워 먹어야 하니까. 허나 무슨 상관이람, 맛만 좋으면 장땡이다. 여력이 된다면 국을 곁들여도 좋다. 콩나물 듬뿍 넣은 맑은 국이나 감자가 들어간 매운 오징어국이 어울린다. 국이 아니어도 라면과 같이 먹어도,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어도 그만이다.

 

김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오래 전 만삭의 몸으로 나를 찾아온 친구와 들어간 곳이 김밥집이었다. 우리는 스물다섯. 아직 식도 올리지 않은 어린 임부와, 조언자 노릇을 한다고 촐싹이던 어린 내가 김밥을 앞에 두고 주고받은 말들. 생각하면 우습고도 처연한 데가 있다.

 

 - 헤어질 거야.
 - 아기는 어떻게 하냐?
 - 혼자 키우지.
 -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
 - 다 끝났는데, 뭐.
 - (한숨) 일단, 김밥이나 먹자.
 - 김밥은 맛있네.
 
설익은 우리들의 대화. 울다가도 김밥은 들어가던 나이. 우리들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조금도 알지 못해 무구했던 날들. 그날 밤. 친구의 남자친구가 내게 전화했고, 우리 집으로 찾아 왔고, 친구는 못이기는 척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손을 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는데 깊은 안도와 함께,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다. 뱃속에서 누군가 비질을 하듯,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따라나선 그녀의 뱃속에서도, 그녀가 잉태한 태아의 조그만 뱃속에서도, 나의 뱃속에서도, 소화되는 중인 김밥을 누가 빗자루로 자꾸만, 쓸고 있을 것 같았다.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슬픈 날은 슬퍼서, 기쁜 날은 기뻐서 김밥은 어울린다. 김밥은 만능이다. 세상에 김밥이 없었다면, 혼자 먹던 숱한 끼니를 나는 뭘로 때웠을까? 영원하라,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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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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