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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감은 몇 시 몇 분?

<월간 채널예스>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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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래도 영감과 동력을 같다고 볼 순 없지. 영감은 반짝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거야. 동력은 그 다음에 등장하면 되고. (2018.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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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이라는 게 무엇이고 그것이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어떻게 옮겨가는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노력을 통해 어떻게 그것이 떠오르는지 자신은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색소폰의 소리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나은 형사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고 그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랭크 모건의 <자장가> 연주를 들으면 일이 더 잘 된다는 건 알았다. (마이클 코널리, 『밤을 새우는 사람들』 에서)

 

『빛 혹은 그림자』  는 여러 작가가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을 엮은 책이다. 영감. 그다지 발음하고 싶지 않은 단어. 영감 운운하면 상황에 따라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오후 4시 반쯤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며 본, 변색된 색조로 반짝이는 수면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입니다.’ 너라면 이런 대사 쓰겠냐?”

 

“안 쓰지. 그런데 사실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할 근거가 딱히 없지 않냐? 충분히 생길 만한 일이기도 하고.”

 

나 역시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감화된 적이 있다. 그럼 대체 “오후 4시 반쯤 (……) 영감을 얻은 작업입니다”의 어느 부분이 촌스러운 걸까 곱씹으면, 역시 항간에 형성된 ‘영감’이라는 고정관념이 원인이 아닐지 짐작할 따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영감은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이다.

 

작업이 막히면 어떻게 돌파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덮어둔다. 당분간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하고 싶은 걸 한다. 독서, 웹서핑, 쇼핑, 몽상, 무엇이든 그때 하고 싶은 일.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막힌 탓에 엉뚱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이 풀어지면 됐지 돌파구를 찾으려는 발버둥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다 보면 뜬금없이 뭔가가 떠오른다. 5분, 2시간, 하루, 1주일 뒤일 수도 있다.

 

“감나무 아래서 입 벌리고 있는다는 뜻이냐?”

 

무슨 소리! 아무것도 안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듯 보여도 꽁꽁 언 재료를 전자레인지가 아니라 실온에 해동해 저온으로 속속들이 익히는 과정이다.

 

“결과는 같은데 시간만 더 걸리는 거 아냐?”

 

누구에게나 권할 만큼 검증된 방법은 물론 아니다. 맨 앞 인용문에 등장하는 형사처럼, 그 방법이 나한테 통한다는 걸 알 뿐이다.

 

평소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결국 착상이나 자극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이를 테면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가 편곡하거나 변주한 버전으로 즐겨 듣는 이유도 편곡/변주 행위를 내가 수행하는 작업과 동일시해 곡을 들으며 감화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고. 동일시한다는 얘기는 책 디자인을 예로 들면, 저자의 원고가 악보가 되는 셈이고 나는 연주자가 되어 그 악보를 연주한다는 말이다. 연주자/디자이너에 따라 동일한 악보에서 다른 음악이 나오는 셈이다. 타인의 정신에서 출발해도 독창성을 충분히 펼칠 수 있다는 생생한 증거들이다. 보다 직접적인 영감을 준 물건은 아마도 레고? 블럭을 쌓아 뭔가를 만드는 놀이에 빠졌던 영향으로 단순한 도형을 기본으로 삼는 모듈 결합 방식 작업을 구상하는 습관이 든 것 같다.

 

‘영감 삼아’ 즐겨 구경하는 물건 중 하나가 손목시계다. 손목시계 디자인의 정수라 여기는 융한스의 막스 빌 시계는 언제나 자극이 된다. 다른 볼록 유리로 덮인 문자판 주위에 가느다란 눈금이 정갈히 새겨졌다. 길이가 다른 시/분 눈금에 시침과 분침의 끄트머리가 정확하게 닿는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묵묵히 정확하게 흐르는 고요한 광경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멋진 명상 도구다.

 

한편 어떤 이들은 시간을 보여주는 방식을 고민한다. 침 대신 시/분/초에 해당하는 세 개의 문자판이 돌아가는 모델이 있다. 잘게 그어 놓은 눈금만으로도 화려한데 세 개가 맞물려 움직이니 눈이 황홀하다. 어떤 모델은 문자판의 절반만 활용한다. 초침이 9시 방향에서 3시 방향으로 갔다가(반원이 60초에 해당) 순식간에 되돌아와 다시 시작한다. 점프하는 침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계의 작동 원리는 대체로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시 눈금 사이를 오등분해 분 눈금을 표시한다. 태엽장치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시침 역시 한자리에 멈춰 있지 않고 꾸준히 움직인다. 예컨대 3시 30분이면 시침이 3시와 4시 사이 한가운데에, 4시 15분이면 4시와 5시 사이의 4분의 1 지점에 놓인다. 분침이 없어도 대략 몇 분인지 알 수 있는 셈이다. 이 움직임을 이용해 분침 없이 시침만으로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는 진작 있었는데 최근 같은 방식이되 시간을 더 정확히 인지하도록 돕는 시계를 발견했다. 눈금의 간격이 열쇠다. 시 눈금 사이를 오등분하는 대신 15/30/45분 간격으로 긋고 그 사이사이를 5분 간격으로 나누었다. 한 개의 기다린 침이 문자판 전체를 가로지르는데 한쪽 끝이 3과 4분의 1일을 가리키면 반대쪽 끝은 9와 4분의 1 지점을 가리키니 3시 15분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명민한 디자이너도 시계를 관찰하다 영감을 얻었을까?

 

영감이 창작자한테만 유효한 개념은 아니다. 창작자 역시 인간이라는 더 큰 범주에 속하고, 인간은 대체로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 영화, 책, 옷, 음식 등에서 얻은 영감으로 일상을 유지해 나가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아으, 당 땡겨” “나 오늘 망가지고 싶어” 하는 이들은 당이나 방종에서 동력, 즉 영감을 얻는 셈이다. 심한 비약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영감이 작업으로서 의미가 생기려면 꾸준한 동력이 있어야 한다.

 

“에이, 그래도 영감과 동력을 같다고 볼 순 없지. 영감은 반짝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거야. 동력은 그 다음에 등장하면 되고.”

 

듣고 보니 또 그렇네. 아무튼 시와 분이 붙어 다녀야 의미가 생기듯이 영감과 동력 역시 파트너가 되어야 의미가 생긴다. 그러려면 두 친구를 일상에서 더 자주 마주쳐야 좋겠다. 시선을 가까이에 둬야겠다. 일단 시계부터 살까나.


 

 

빛 혹은 그림자스티븐 킹,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조이스 캐롤 오츠, 로렌스 블록 저 외 12명 | 문학동네
호퍼를 유독 사랑하고 그의 그림에 매료되곤 하는데, 그것은 아마 호퍼의 그림이 일상의 한순간을, 어떤 이야기든 탄생할 수 있는 어느 찰나의 순간을 화폭에 담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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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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