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현성의 어쿠스틱 노트
나의 영웅들에 대하여
그냥 우리랑 기준이 완전히 달랐던 거야
이들이 나의 영웅들이다. 그들과 나눈 이야기는 어릴 적 추억들, 그 시절의 노래를 떠올리게 했다. (2018. 11. 15)
사진_임종진
‘누군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세션 연주자 형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발단은 약간 우발적이었다. 친한 작곡가와 오랜만에 만났다가 얼결에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마침 임창정 선배의 녹음이 진행 중이었고, 거기서 드러머 강수호 형을 만났다. 수호 형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고의 세션 드럼 연주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발표된 히트 발라드곡 중에 절반은 그가 연주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오랫동안 가수로 활동하지 않았던 탓에 십여 년 만에 보게 된 것이었는데, 그사이 그는 야위어 보일 만큼 살이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997년에 〈소원〉을 녹음하던 때였다. 건장한 체격에 긴 머리를 질끈 묶은 그는 한 손에 드럼 스틱과 심벌을 들고서 녹음실에 들어섰다. 기인 같다고 할까, 뿜어져 나오는 예술가의 포스에 생짜 신인이었던 나는 압도당했다. 녹음이 시작되고, 그는 마치 퍼포먼스처럼 화려한 동작으로 드럼을 두드렸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연주의 강렬함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저런 사람이 프로구나, 진짜 연주자구나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녹음실의 스텝들, 작곡가, 매니저도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작두 탔네, 작두 탔어.” 조규만 형은 자신의 곡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에 흡족해하며 말했다. 그만큼 그날의 연주는 압도적이었다.
이번에 인터뷰를 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시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세션을 시작한 지 겨우 1년 남짓했을 때였다는 것이다. 그의 연주에 대한 소문은 불과 몇 개월 만에 업계에 퍼졌고, 나의 1집 음반에서 유일한 어쿠스틱 발라드곡이었던 〈소원〉은 타이밍 좋게도 그의 손을 빌려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그날 녹음실의 증인으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해 겨울 거리마다 울려 퍼진 〈소원〉의 성공에는 드러머 강수호의 예술적인 연주가 한몫을 차지한다고.
사진_임종진
수척하다 할 만큼 야윈 모습을 보며 세월이 꽤나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경상도 사투리가 찌개 간처럼 짭짤하게 밴 말투로 물었다. 나는 지금은 노래를 안 하고 있다고, 다시 하고 싶은데 너무 오래 쉬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네 노래는 유행에 휩쓸리는 음악이 아니니 언제든 용기 내서 해보라고, 따듯한 조언을 건넸다. 그의 눈빛과 희끗한 머리칼, 회색빛이 도는 셔츠를 입은 모습이 마치 〈스타워즈〉에서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오비완 같다고 생각했다. 혈기 넘치던 젊은 연주자는 노련한 스승이 되어 내 앞에 있었다. 그의 근육처럼 부드러워진 말투와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거장의 호칭이 따르는 그지만 한편으로 녹음실 밖의 대중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좀 부당한 것이었다. 음악성을 기준으로 보아도, 뮤지션으로서 이룬 것을 생각해도 그는 좀 더 세상에 알려질 가치가 있었다. 수호 형과 더불어 그 시절 녹음실을 누볐던 연주자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함춘호(기타), 이근형(기타), 샘리(기타), 장혁(드러머), 최태완(피아노), 신형권(베이스), 이태윤(베이스), 김현아(코러스), 임창덕(엔지니어) 등등. 이제는 모두 전설로 언급되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로 기억되는 동시대 연주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1960년대생으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다. 어떤 세대의 뮤지션들도 이들만큼 많은 녹음과 연주 경험을 하지 못했다. 또 어쿠스틱 음악과 컴퓨터 음악을 모두 경험한 세대로, 우리나라 1세대 뮤지션들의 가요를 듣고 자라 지금의 K-pop까지 내부에서 경험한 우리 가요의 산증인들이다. 이들의 음악 인생이 곧 대중음악의 역사다. 미8군에서 음악을 배운 베이시스트 신현권, 한국 포크음악의 한 축인 함춘호,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록 신(scene)을 이끈 기타리스트 이근형 등. 당대 최고의 연주자인 만큼 이들의 행보에는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가 긴밀하게 얽혀 있다.
하지만 연주자 중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기타리스트인 함춘호의 경우에도 그가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의 음악적 철학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이따금 언론의 주목을 받곤 했지만 충분히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뛰어난 가수와 작곡가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듯 이들 연주자에 대해서도 더 자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의 소중한 일부로서 기록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스튜디오를 나서는 순간부터 그런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진_임종진
누군가는 세션 연주자가 그렇게 대단한 창작자냐고, 기록할 만큼 가치가 있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또 세션은 언제든 다른 연주자로 대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뛰어난 가수나 작곡가의 음악성이 다른 아티스트와 대체되지 않는 것처럼 훌륭한 연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세션 연주자로 선택을 받아왔다.
그날 이후 인터뷰를 위해서 연습실에 수호 형을 찾아갔을 때, 그는 나를 스피커 앞에 앉히고는 직접 믹스한 드럼 연주를 들려주었다. “요즘 애들 음악 들으면서 처음에는 드럼 사운드가 진짜 엉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연구를 하다 보니까 애들이 틀린 게 아니더라고. 그냥 우리랑 기준이 완전히 달랐던 거야.” 요즘 그는 후배들이 리얼(어쿠스틱)드럼 연주를 컴퓨터 음악에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연구 중이다. 경력이 몇 년이 되었고 나이가 얼마건 간에 그들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연구하고, 빠르게 변하는 음악 환경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연주자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치열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들이 나의 영웅들이다. 그들과 나눈 이야기는 어릴 적 추억들, 그 시절의 노래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과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되새기게 해줬다. 우리나라에서 음악인으로, 그중에도 연주자로 평생을 살아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하지 않을까. 글을 잘 쓰기보다 이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전해지길 바랐는데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이들의 연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도 계속될 것이다.
<소원>, <헤븐> 등의 노래를 불렀다. 산문집 『당신처럼 나도 외로워서』를 발표했고, 현재 음악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