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박선아의 ( ) 산책
“잠수교 건너본 적 있어요?” 동료와 외근을 하러 가던 길, 멀리 잠수교가 보이기에 물었다. 정말 궁금했다기보다는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해본 질문이었다. “네. 비 오는 날, 건너봤어요.” “비가 오는 날? 걸어서요?” “네. 걸어서.” 의외의 답에 마땅한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아 창밖을 봤다. “어땠어요?” 좋았다는 느낌을 설명하는 동료는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얼마나 좋았을까? 비바람이 불어서 강물이 파도처럼 보였겠지. 다리 위로 넘칠까 봐 무섭기도 했겠다. 우산이 날아가지 않게 손잡이를 꽉 쥐게 되었으려나. 어쩌면 우산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 목소리가 들뜬 것 보니 아마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걸었을 거야.’ 비가 오는 날, 잠수교를 걸어서 건넌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분주한 상상에 빠졌다. 늘 차분하던 동료의 목소리가 빨라진 일이 생각에 리듬을 만들어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상상은 근사했다. 비가 오는 날, 잠수교를 건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라니. 그런 장면을 생각하다 보니 언젠가 보았던 비슷한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가고시마의 어느 호텔에서 맞이한 새벽이었다. 취해서 일찍 잠이 든 바람에 애매한 시간에 눈이 뜨였다. 조금 더 자보려고 뒤척거리다가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아 암막 커튼을 걷어보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파 등에 팔을 얹고 그 위로 턱을 얹어 밖을 보기 좋은 자세를 만들었다. 다시 졸려지면 그대로 잘 수 있도록 몸은 동그랗게 말아 구겨 넣었다. 전날에도 이 자리에 비슷한 자세로 앉아 운동장에서 야구하는 아이들을 구경했기에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적이던 오후의 운동장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새벽의 운동장이 어제와 달리 보이긴 했다. 조용한 호텔방에 내 숨소리만 점점 더 크게 찼다.
눈동자를 굴려 골목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어느 틈인지 한 사람이 운동장에 와 있었다. 우산을 쓰고 걷고 있었다. 운동장과 창문의 거리가 꽤 되었기에 성별이나 나이는 알 수 없었다. 어떤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형체만큼이나 감정도 애매하게 보였다. 기쁜 마음으로 신이 나서 걷고 있는 걸까.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걷고 있을까. 천천히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씩씩한 걸음이란 것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운동장을 걷는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바퀴, 두 바퀴, 그가 운동장을 도는 횟수를 세어보았지만 중간에 잊어버렸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숫자를 잊어버린 일이 멋쩍어 일기장을 꺼내 ‘비 오는 날의 산책은 멋진 거’라고 적어두었다. 비가 오는 새벽에 운동장을 산책하는 마음은 어떤 걸까. 누군가의 마음에게는 미안하지만, 텅 빈 운동장을 걷는 뒷모습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새벽은 든든해졌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에 물웅덩이에서 놀다가 피아노 학원에 가지 못한 기억이 있다. 학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레슨 시간이 끝나 있었다. 스타킹과 옷이 온통 흙탕물로 젖어 학원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전화를 건 뒤,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게 어린 나에게는 산책 비슷한 일이었을 거라 여긴다. 어른의 나이를 가진 뒤로는 비가 오는 날, 목적지 없이 걷거나 멈춰 선 기억이 거의 없다. 비가 오면 짬뽕이나 먹으러 가자고 친구를 꼬이고, 그게 아니라면 전기장판 위에 누워서 영화를 보곤 한다. ‘어디 한 번 산책을 가볼까.’ 이런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잠수교를 건너던 동료나 운동장을 돌던 사람의 뒷모습이 근사하게 느껴진 것을 보면 한 번쯤 우산을 들고 나서볼 법도 한데 아직이다. 상상으로 그치는 일들이 있다. ‘멋지겠지.’ 하고 잔뜩 그려만 두고 막상 나서지는 않게 되는 일들. 나는 언젠가 비 오는 잠수교나 운동장을 산책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어느 날에 운동장과 잠수교를 걸어준 사람들, 그들이 보여준 뒷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 뿐이다.
나는 사진 속 여자의 등에 난 몇 개의 점을 바라봤다. 상상 속에서 그 점들을 선으로 잇기 시작했다. 하나의 점과 하나의 점을 잇고, 흩어진 몇 개의 점 사이를 통과하면 북두칠성 모양이 되었다. 자신의 몸이지만 누군가 말해주기 전까지 여자는 평생 모를 이야기일 것이다.
“자기 뒷모습을 볼 수 없다는 건 삶에 대한 은유 같아.”
-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229쪽)
애인의 애인에게백영옥 저 | 예담
네 명의 연인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성공, 그리고 쓸쓸한 그 뒷모습을 주목하면서 상처와 실패를 통해 성숙해가는 젊은 예술가들의 심리를 예민하게 그려냈다.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