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박선아의 ( ) 산책
누군가와 걷다가 적당한 타이밍이 생기면 꺼내놓는 얘기가 있다. ‘은행나무의 비밀’이라 부르는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과 은행을 피하며 걷다가 멈춰 서서 들려주기도 했고, 친구와 말없이 걷다가 앙상한 은행나무가 보여 꺼내기도 했고, 동료와 시골로 취재를 가서 오솔길을 걷다가 은행 나뭇잎을 발견하며 말해주기도 했다. 분주하게 걷거나, 일을 하거나, 여러 사람과 있을 때는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여유롭게 한 사람과 산책을 하다 보면 문득 생각이나 꺼내 보게 되는 이야기다. 은행나무의 비밀은 “은행 나뭇잎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아?”로 시작된다. 대부분 모른다고 답한다.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다른 한 손의 엄지와 검지로 새끼손톱 아랫부분을 잡는다. “이만하게 작아.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돼.”
서울에 온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그때는 옥탑방에 살아서 자주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 마른 이불을 걷으려고 옥상에 나갔다가 집 앞 나무의 작은 잎을 봤다. 초록도 아니고 연두도 아닌 색의 잎이었다. ‘이 나무가 뭐였더라.’ 잎 모양을 가까이 보고 싶은데 형태가 보일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다. 바싹 마른 이불을 돌돌 말아 안고 아슬아슬하게 옥상 난간에 서서 고민했다. 뭐였더라, 뭐였지, 이불을 방에 던지듯 놓아두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나무에 가까이 가니 두툼한 줄기에 버섯처럼 붙어있는 잎들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한 잎을 짚으며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웃음이 나옴과 동시에 지난가을에 이 밑에서 은행을 안 밟으려고 까치발로 걷던 일이 떠올랐다. 한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그 계절에 아무 잎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새 까먹었다. 가지에 걸린 잎은 멀리서 보면 그저 둥그런 어린잎에 지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잘 알고있던 은행 나뭇잎 모양이었고, 그 크기가 원래 아는 크기의 1/50쯤이라 웃음이 나왔다. 귀여웠다. 설마, 이렇게 자라는 건가. 20여 년간 보았던 모든 은행나무가 이렇게 자랐던 걸까. 가만히 서서 멀리까지 다녀온 것 같았다.
은행 나뭇잎 얘기는 자주 잊고 지낸다. 잊어버리고 살다가 영 한가하거나 그 흔한 은행나무가 눈에 밟힐 때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그럴 때 같이 걷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내가 처음에 그랬듯 그 얘기를 신기하게 여겨준다. 아직 아무도 은행나무의 시작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비밀이라 부르게 되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옆에 선 사람들이 웃을 때, 내가 모르던 그들의 어린 시절 모습을 잠시 발견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갔을 거고, 지금 이 순간도 내가 모르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시작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들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가진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보내줘야 할 때가 있다. 은밀하게 갖고 있던 이야기가 더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면 그걸 멀리 보내주고 다른 비밀을 기다린다. 부지런히 기웃거리며 산책하다 보면 우연히 발견하게 될 작은 비밀. 그리고 어쩌면 모든 산책은 한 나무 앞으로 돌아오는 길이란 걸 알아차리게 할 놀라운 비밀을.
지금은 서울에서의 일곱 번째 집에 산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집 근처에 좋아하는 나무가 하나씩 생긴다. 일부러 찾아 나서지 않아도 자꾸 한 나무가 눈에 밟히고 마음을 두게 된다. 반환점처럼 그 나무를 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집에서 멀어지면 종종 그 나무들을 떠올리는데, 요즘은 앞집 마당에서 자라는 감나무가 그렇다. 떠올린 나무의 모양이 가물가물하면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을 때가 많고, 그 나무의 오늘이 선명하면 내 삶도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당신 생각은 왜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럼 저는 왜 당신의 그림이 늘 아름답게 느껴지죠? 처음 본 순간부터 감탄한걸요." 스트로브의 입술이 약간 떨렸다. "그만 들어가 자요, 여보. 나는 이분과 산보나 좀 하고 돌아오겠소."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102쪽)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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