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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빈약한 날의 글쓰기

<귀를 기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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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발적으로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쓰는 이들. (2018. 10. 05)

캡션_일러스트 손은경.JPG

          일러스트 손은경

 

 

예전에 본 이야기 하나를 떠올린다. 도서관에 가던 중 뚱뚱한 회색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무작정 따라가는 중학생 여자애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고양이를 따라가면 어쩐지 새롭고 재밌는 일을 마주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고양이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그녀를 안내하더니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신나게 따라가다가 맥이 빠져버린 주인공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댄다.

 

“에이, 모처럼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는데!”

 

흥미로운 마음으로 쫓던 무언가가 사실 딱히 대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주인공은 다시 갈 길을 간다. 심드렁한 얼굴이다. 언젠가 나도 그런 얼굴로 어딘가를 걸었던 것 같다. 일상에서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완성되는 경우는 그보다 더 희귀할 테다. 그렇지만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주인공이 심드렁한 얼굴로 걷는 그 순간조차 이야기의 기승전결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건 완성된 애니메이션이니까. 완성된 이야기는 대체로 어떤 포만감을 약속한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만화라면 더더욱 의심할 것도 없다.

 

그런가 하면 삶의 경우는 어떨까. 삶은 어떤 포만감을 나에게 주고 있나. 삶이 완성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으나 그저 시작에서만 그친 일들이 내 인생에는 아주 많다.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나 날마다 어떤 일을 겪는다. 모두가 어딘가에서 크고 작은 자리를 차지한 채로 하루하루 자라고 늙어가고 죽어간다. 별일이 없는 시간이나 아무것도 안 하며 흘려보낸 시간을 겪었다고 해도 시간과 함께라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시간을 겪고 나면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생길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날마다 완성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삶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일상이 이야기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일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칠 수도 있겠으나, 그것들을 자기 마음속에만 품고 살아가는 것과 글로 써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이다. 모든 일상을 이야기화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로 느껴진다. 그럼 이야기를 성급하게 완성할 가능성이 높다. 또는 어떤 순간 속에 있을 때 시간의 속도대로 온전히 체험한다기보다는 마음이 먼저 미래에 도착해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올지를 기다리게 되기도 한다. 독자를 상정한 채로 인생을 겪는 건 뭔가 이상한 일이다.

 

사실 나는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해서라면 한 글자도 쓰고 싶지 않다. 그저 나 혼자의 일로 혹은 나와 함께 그 순간을 겪은 상대와의 일로만 남도록 두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그런 내가 일간 수필 연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판 연재 노동자는 매일 뭐라도 한 편씩 완성하며 지낸다. 뭐라도 쓰자고 약속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거나 쓸 수는 없다. 읽는 이가 돈과 시간을 들일 만한 것을 쓰고 싶어서 매일 저녁 하얀색 화면을 마주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움 때문에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하는 날이면 나는 위에서 말했던 애니메이션을 본다.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귀를 귀울이면>  이다. 이 이야기에는 아무도 안 시켰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는 중학생 여자애가 나온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발적으로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쓰는 이들. 남의 책을 참고해가며 자기 문장을 쌓아가는 이들. 도대체 어째서일까. 잘 설명 못하겠는데 나 역시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더 많은 책을 만나게 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주인공은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문장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런 가사다.

 

외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자고 꿈을 꾸었어
(ひとりぼっち おそれずに いきようと ゆめ みてた)
쓸쓸함을 억누르고 강한 자신을 지켜나가자
(さみしさ おしこめて つよい じぶんを まもっていこ)

 

주인공의 노래가 너무 서툴고도 맑아서 난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웃는다. 그런데 웃는 동안 왜 마음이 조금 아픈 것인가. 그녀와 내가 비슷한 약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외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자고 다짐하는구나. 이 사람도 글을 쓰면서 자신을 지켜나가는구나. 그녀의 모습을 몇 번이나 다시 보면서 나는 글쓰기가 나를 해치는 일보다는 살리는 일에 더 가깝다는 걸 기억해낸다. 그러고는 뭐라도 쓰기 시작한다. 빈약한 이야기라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낫다고 믿으면서 쓰기 시작한다. 계속 쓰면서 나아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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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슬아(작가)

연재노동자 (1992~).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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